[유시민의 세상읽기]'1대4' 그 치명적 영향

  • 입력 2000년 1월 25일 20시 09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으로 폭발한 유권자의 강력한 정치권 ‘물갈이 요구’에 직면한 여야는 이른바 ‘젊은 피’를 하나라도 더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는 중이다. 그런데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야 모두 국회의원의 세대교체를 가로막는 제도적인 문제를 그대로 둔 채 젊은 사람을 끌어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 제도적인 문제란 다름 아닌 도시와 농촌 선거구 사이의 인구편차다. 여야 정당들은 예전부터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최대 4대 1까지 허용하면서 선거구를 획정했는데 이번에도 그대로 갈 작정인 모양이다. 이처럼 극심한 인구편차가 헌법상의 평등권을 침해함으로써 젊은 세대의 정치적 진출을 가로막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예컨대 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몇몇 선거구의 유권자수를 비교해 보자. 중앙선관위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 관악을은 20만8000, 부산 해운대-기장갑은 19만9000, 대구 달서을은 16만6000, 대전 중구는 18만1000, 광주 남구는 16만7000 명이었다. 여기서 당선되려면 최소한 5만∼6만 표가 필요했다. 하지만 경북 의성은 6만5000, 경남 창녕은 5만9000, 강원도 삼척은 6만2000, 전북 고창은 6만, 전남 무안은 5만3000명에 불과했다. 이런 곳에서는 2만 표 정도만 받아도 당선되고도 남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시와 광역시 등 대도시 선거구의 유권자 수는 농촌지역보다 두세 배나 많다. 도시 주민들이 한 표를 행사할 때 농촌 주민들은 두세 표를 행사하는 셈이다. 이것은 누구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의 원리에 크게 어긋난다.

이와 같이 불합리한 제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우리 국회의 수준과 정치문화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고 있다. 첫째, 농촌 유권자는 도시 유권자보다 현저히 나이가 많다. 둘째, 대도시 유권자들은 농촌 유권자보다 학력이 훨씬 높다. 셋째, 도시 지역에는 생산직 사무직 노동자와 자유전문직 종사자가 많고 농촌에는 농민과 영세 또는 중소상인들이 많다. 한마디로 고도 산업화와 정보화의 흐름을 타는 직업에 종사하는 도시의 젊은 고학력 유권자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급격히 감소하는 전통적 산업에 종사하는 고령의 저학력 유권자들이 두세 배나 많은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 측면을 결합해 보면 최대 4대 1에 이르는 도농간 선거구 인구 편차의 정치적 악영향은 치명적이다. 전체 인구에서 젊은 유권자의 비중이 커지는 가운데 사회는 고학력화 정보화 국제화로 치닫고 문화는 다양화 민주화되어 간다. 그런데도 국회에는 그 변화를 이해하기조차 힘겨운 농촌지역의 저학력 노령 유권자들이 뽑은 국회의원이 너무나 많다. 그 결과 사회는 이미 21세기 정보사회 지식기반사회에 들어섰는데 국회는 70년대 헌책방이나 노인정 비슷한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19세기형 권위주의 정치문화가 판을 치는 한 젊은 정치인이 국회의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며 또한 된다고 해도 역량을 발휘할 수도 없다. 이런 면에서 정치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극단적인 불신은 단순한 정치현상이 아니라 국민과 정치권의 문화적 차이에서 빚어지는 하나의 문화충돌 현상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은 근본적으로 고학력의 젊은 전문인들이 주도하는 시민사회와 낡은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정치권 사이의 문화적 불일치가 더는 억누를 수 없을 만큼 확대 심화된 결과 나타난 것이며 여야 정당의 ‘젊은 피’ 영입은 이 갈등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문화적 접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수밖에 없다.

선거구획정위원회의 시민대표들이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현역의원 위주의 기득권 지키기에서만큼은 ‘찰떡궁합’을 과시해온 여야 협상대표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 ‘기득권 카르텔’을 깨부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낙천낙선운동의 정치적 효과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