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윤호진/제대로 된 공연장을 꿈꾸며

  • 입력 2000년 1월 26일 19시 26분


윤 호 진(단국대 연극영화과 교수·뮤지컬 명성황후 연출자)

지난 연말 연시에 보름 동안 런던과 파리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모처럼 만의 가족 여행이었는데 12월31일을 런던에서 보낸 덕분에 런던 밀레니엄 행사를 볼 수 있었다.

버킹엄 궁전 앞의 대형 놀이기구를 비롯해 모든 밀레니엄 설치물은 사람들이 직접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31일 저녁 무렵부터 나는 템스강변에 있었다. 밀려드는 인파 속에 우린 가족을 잃을까봐 서로 목도리로 묶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우린 300만명의 인파 속에 들어가 있었다. 자정을 넘기면서 템스강 전역은 일제히 폭죽파티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오랜 시간 불꽃놀이를 즐긴 것은 처음이다. 마치 대영제국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한발에 수천만원이나 한다는 그 비싼 폭죽을 말이다.

▼런던의 뛰어난 시설 부럽기만▼

31일 이후에는 주로 공연을 보러 다녔다. 나같이 공연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런던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길거리 어디를 가도 조그만 소품 공연들이 즐비하고 영국의 브로드웨이라 불리는 웨스트엔드에 가면 언제 어느때고 세계 최고의 공연물들을 만날 수 있다. 낮에는 한적하고 조용하다가도 극장문을 여는 시간이 되면 멋진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런던 최고의 걸출한 인물들과 전세계 관광객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극장을 찾는 관객이 연간 1200만명이나 되고 이중 상당수는 관광객이라고 한다.

영국은 문화 선진국답게 새 천년을 맞이해 1000년을 이어갈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뛰어난 건축미의 대형 밀레니엄돔으로 세계적인 각종 공연행사가 이미 시작되었고 복권기금을 이용해 로열오페라하우스가 위치한 코벤트가든도 이미 새단장을 마쳤다. 순수 예술의 르네상스 시대라는 2000년대를 맞아 세계 최대는 아니라도 우리도 제대로 된 전용극장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또 한가지는 뮤지컬 ‘명성황후’ 런던 공연의 가능성이다. 얼마 전부터 웨스트엔드에 극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제작자로 나서기 시작한 뮤지컬 ‘캣츠’의 작곡자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최근 몇년간 선보인 작품이 그리 호평을 받지 못하면서 영국 뮤지컬의 아성이 무너지고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설 ‘테스’의 뮤지컬 버전이나 영화로 유명한 뮤지컬 ‘캐스퍼’ 등의 신작들도 100∼200명을 놓고 공연하는 침체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런던 뮤지컬시장에 ‘틈새’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런던 뮤지컬은 현재 소재고갈에 허덕이고 있다.

물론 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명성황후를 런던에서 공연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한국문화의 세계화가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명성황후의 뉴욕 브로드웨이 진출이나 ‘쉬리’ ‘난타’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볼 때 망상만은 아니라는 자신감이 든다.

▼정부-기업 과감히 투자하길▼

다만 턱없이 극장이 부족한 한국 공연계의 문화 인프라 형성을 통해 문화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그릇이 있어야 음식도 여러 가지로 만들어보고, 또한 다양하게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좀 부족하더라도 문화가 풍부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 런던의 유명 뮤지컬을 한국에서 볼 수 있고 한국의 명성황후를 런던에서 볼 수 있는 시대. 문화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진정한 선진국은 바로 문화 선진국이라고 본다. 죽어가는 대학로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정부나 기업도 생색내기 식의 문화행사 지원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 가능성 있는 공연에 과감히 투자하고, 제대로 된 극장 건축에 투자하는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

사실 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갈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다. 문화 인프라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이나 망설임보다는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하고자 하는 결단과 용기가 중요하다. 장기적인 안목의 문화육성을 위한 정부와 기업의 인식 대전환을 간절히 기대해 본다.

윤호진(단국대 연극영화과 교수·뮤지컬 명성황후 연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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