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335)

  • 입력 2000년 1월 27일 18시 30분


문득 당신과의 몇 개월이 스쳐 가더니 다시 이희수씨가 말하던 아름다운 공동체 생각이 지나가고, 희미하고 아련하게 작은 식탁 위를 채우고 있는 촛불이 보였습니다.

이제부터 물신의 세계가 지배할테지. 시장은 모든 지구 사람들에게 동일한 생산양식을 강요하고 망하지 않으려면 이게 문명이니까 받아들이라고 들이댈 거야. 누구나 번들거리는 크리스탈 눈알이 되어 아무런 상상력도 없이 돈에 반응하는 상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지두 몰라.

나는 이희수씨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자마자 무기력한 냉소가 입가에 번지던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같은 느낌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는 것처럼 송영태에게 말했어요.

어쨌든 이게 우리가 만난 세상이야. 나는 별로 더 이상 기대하는 게 없다구.

그대는 이 선생을 사랑한게 아닐 걸.

여긴 낯선 동네니까 맘 놓구 얘기해라. 널 떼어 놓구 갈 수도 없으니까.

한 형, 그대두 지금의 나처럼 어딘가 딴데루 새구 싶었던 거야.

그래…?

하고 나는 맥없이 한마디 했을 뿐예요.

껍질만 남아버린 대륙에서 또 다른 날이 밝았습니다. 오전에는 호텔 로비에서 일본 여행사 직원의 안내로 인원 점검을 받았고 주의 사항을 들었지요. 대부분이 일본인 관광객들이었는데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었어요. 노부부도 한 쌍 끼어 있었구요. 오후 두 시에 콤소몰 광장 앞에 있는 야로슬라프스키 역으로 갔어요. 블라디보스토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오후 세 시 출발이었어요. 출발에 앞서 영태와 나는 안내인의 충고대로 식료품을 사러 광장 건너편에 있는 베료스까에 가서 담배며, 보드카, 살라미 소시지, 햄, 인스탄트 커피 등속을 큰 꾸러미로 세 봉지나 샀습니다. 외국인 여행객들은 그때만해도 대륙횡단 중에 노선을 변경하거나 중도에서 내려 체류할 수 없었지만 단체 여행자들은 허용을 했어요. 시베리아 횡단열차인 러시아호는 일주일이 걸렸는데 우리는 이르쿠츠크와 하바로프스크에 하루씩 호텔 숙박이 예정되어 있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산하게 되어 있었지요. 기관차는 붉은 별이 달린 녹색의 전동차였고 일 등 칸과 이 등 칸 밖에 없어요. 외국인은 모두 일 등을 이용하게 되어 있어요. 하늘색 셔츠에 곤색 넥타이와 스커트를 입은 여승무원이 승강구 옆에 서서 우리를 안내해 주었어요. 유럽처럼 간막이가 된 객실 안에 소파겸 침대가 양편에 있고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요. 창가에 간이탁자가 달렸는데 바닥엔 카페트도 깔려 있지요. 여승무원이 담요와 베개 시트 수건을 각 방에 나누어 주었어요.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고 교외로 나서자 어디서나 자작나무 숲이 보였어요. 어둠 속에서도 희끗희끗한 나무가 흘러서 지나가는게 보였지요. 다른 곳에서는 초가을인데도 여기선 벌써 깊어져 잎이 갈색으로 물들었어요. 모스크바 강을 건너 기차는 키로프를 향해서 달렸어요. 아직은 우랄산맥을 넘기 전까지는 시베리아가 아니예요. 어둠 속에서 더욱 짙게 이빨처럼 치솟은 검은 숲의 벽이 들판을 따라서 끊겼다 이어지곤 했습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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