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정체 벗어날 길 없나
퇴출대상 명단을 놓고 특히 자민련의 반발이 거세다. 찍힌 소속의원이 상대적으로 가장 많고 거기에 김종필명예총재까지 ‘은퇴’하라는 판이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를 겨냥해 ‘헌정질서 파괴’를 분쇄한다는 결의대회로 맞불을 놓고 정권 핵심부도 가담한 음모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등 불만이다.
그러나 정치사의 이런 혁명적인 일소(一掃)작업은 바로 JP와 5·16주체들이 최초로 발안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그런 인위적인 세대교체 운동의 선두주자가 40년 세월과 함께 칠순 정객이 되고, 어느날 갑자기 ‘회전의자’에서 물러나라는 강요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당 공천이라는 제도를 들여온 것도 JP득세 이후의 3공이니, 그 공천 ‘낙천’문제로 JP와 자민련이 옥죄임을 당하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이것을 자연계의 순환 이치 같은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당대에 돌아마주치는 업(業)으로 말할 것인지, 참을 수도 없고 견뎌서도 안되는 ‘어지러운 민중주의’로 볼 것인지는 이 글의 테마가 아니다. 다만 기가 차도록 변하지 않는 이 나라 정치의 주기적인 ‘부패 청산’ 운동을 지켜보면서 역사의 정체(停滯)를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60년대초 5·16주체나, 80년 신군부나, 2000년초의 시민단체나 ‘썩은’정치인 퇴출이라는 꼭 같은 테마를 내걸고 있다. 이번 ‘시민파워’를 총칼로 정권 잡은 집단의 ‘불순한’파워게임과 뭉뚱그려 병렬(竝列)로 놓고자 하는 게 아니다. 앞서 두 번은 군인들이 폭압적으로 벌인 밀어내기요, 이번은 시민들이 저항차원에서 벌이는 민주적인 물갈이 운동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교체 대상도 5·16주체는 ‘비양심적’정치인, 신군부는 ‘비리’정치인, 시민단체는 ‘부패행위’정치인이라고 조금씩 달리 부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본질이 고인 정치의 썩은 수질(水質)을 바꾸려하고, 민심 저변에 ‘썩은 세력을 밀어내라’는 여망과 갈채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명분도 초법적 접근도 엇비슷하다. 38년 전 박정희장군은 말했다.“구시대의 ‘비양심적’ 인물들이 출마한다고 떠들고 다니지만 압력을 가해서라도 못하게 할 것이다. 부정부패의 재(再)대두를 막고 참신한 정치도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공민권 제한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정치정화법(淨化法)으로 묶은 사람은 총 1336명. 규제당한 측의 반발이 “왜 자유당계는 살려주고 민주당계와 신민당계만 때려잡느냐”는 불균형론이었던 것도 요즘과 어딘지 통하는 것 같다.
80년 신군부가 정치활동규제자 811명을 한 다발로 묶어 ‘싹쓸이’할 때를 보자.‘정치풍토 쇄신과 도의정치 확립으로 민주정치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새 시대 새 정치라는 역사적 필연성과 국민의 염원을 담아… 부패에 현저히 책임있는 자에게 그 정치적 책임을 추궁해 새시대에 부응하는 정치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당시의 발표문)
그리고 20년이 흘러 이제 총선연대 등은 외친다. ‘부패 타락한 정치의 일그러진 모습, 그리고 자정(自淨)능력을 상실한 정치권.’ 5·16군부 신군부가 외치던 그럴듯한 구호와 숭고한 목표는 20년 시한부로 타락 퇴색해 버리고 다시 시민의 이름으로 같은 구호가 외쳐지고 부패정객 퇴출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덧없는 공전(空轉)인가.
◆시민운동이 종지부 찍어야
오늘의 이 소중한 시민운동만은 새 천년을 위한 ‘마지막’씻김굿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퇴출 대상자를 공정하게 가려 옥석 구분의 시비를 줄일 것, ‘퇴출판정’을 정치탄압이라고 되받아 치며 지역감정 등을 자극하면 대부분 오뚝이처럼 살아났던 사실을 기억할 것, 퇴출운동 주체(시민단체)의 일부가 정치화하고 ‘신악(新惡)’으로 변하지 않도록 경계할 것 등이 그것이다. 과거의 정객퇴출과는 동기와 정신 추진력이 전혀 다른 이번 시민운동은 반드시 성공, 정치사의 제자리걸음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김충식〈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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