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21세기 도전]제조업을 살려라

  • 입력 2000년 1월 27일 19시 26분


전후(戰後) 일본경제의 기적을 가능케 한 원동력은 경쟁력 높은 제조업이었다. 일본은 근면한 국민성과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공업화사회의 최우등생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제조업은 지금도 강하다. 스위스에 본부가 있는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지난해 ‘세계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경쟁력은 16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역수지 흑자액과 노동자 직업윤리는 여전히 세계 1위다. “제조업이 강하므로 일본경제는 튼튼하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일본의 제조업은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다. 소득수준 증가로 가정에서 필요한 웬만한 제품이 갖춰지면서 수요증가에 한계가 생겼다. 제품의 질이 아무리 높아도 사려는 사람이 줄어들면 기업이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1990년대 일본 장기불황의 한 핵심원인도 여기에 있다. 1998년 일본자동차 판매대수는 전년보다 11.2% 감소했다. 절정기였던 1990년과 비교하면 70%에 불과했다. 제조업의 근간인 조강(粗鋼)생산량도 1998년에는 전년보다 10.5% 줄었다.

일본 제조업이 해결해야 할 공통적인 과제는 ‘3개의 과잉’으로 불린다. 설비 채무 고용의 거품이 공급과잉을 초래해 경쟁력약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 거품경기 때 기업의 무분별한 투자확대와 신규채용이 ‘과잉 3형제’를 낳았다. 경제기획청은 지난해 경제백서에서 과잉설비총액을 41조엔, 과잉인력을 228만명으로 추산했다.

일본정부는 작년부터 본격대비에 나섰다. 경제정책의 패러다임은 기존의 ‘케인스식 유효수요 창출정책’에서 ‘공급중심 경제정책’으로 전환됐다. 1998년 한해 동안 3차례의 추가경정예산까지 내놓으면서 경기부양책을 썼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이 배경에 깔려 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는 작년 3월말 주요 각료와 이마이 다카시(今井敬)경제단체연합회장 등 재계인사 17명을 위원으로 하는 총리직속의 산업경쟁력회의를 발족시켰다. 1983년 미국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어져 1990년대 미국경제 부활의 발판이 된 ‘영 위원회’를 모델로 했다. 위원 선정이 너무 대기업 최고경영자에 편중됐다는 지적 때문에 한국계 일본인 손정의(孫正義·일본명 손 마사요시)소프트방크사장 등 3명이 추가로 포함됐다. 현재도 한달에 한번 가량 정기적으로 열리는 이 회의는 △과잉설비폐기 △고용대책 △기술진흥 △벤처기업 육성 및 중소기업지원책 등 산업재생을 위한 현안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정책에 반영해 왔다.

작년 8월 국회를 통과한 산업활력재생특별조치법(산업재생법)은 ‘3개의 과잉’을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 대책이었다. 2003년까지의 한시입법인 산업재생법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과잉설비 해소 등 구조조정을 벌이는 기업에 세제 및 법제상 우대조치를 해주도록 했다. 작년 11월 스미토모 금속공업이 처음으로 이 법의 적용을 받은 데 이어 10여개 기업이 현재 정부에 신청을 내놓고 있다. 산업경쟁력회의 멤버인 오쿠다 히로시(奧田碩)일본경영자단체연맹회장은 “이 법이 만들어짐에 따라 대부분의 산업에서 경쟁력 회복이 가능해지게 됐다”고 말했다.

재계도 과잉해소를 위한 구조조정에 나섰다. 일본 전자회사 NEC는 올해부터 3년간 전 직원의 10%인 1만5000명을 줄이고 올해 설비투자액을 20% 줄인다. 도시바와 히타치제작소도 3년간 각각 6000명과 4000명의 직원을 감축한다. 프랑스 르노자동차가 경영권을 장악한 닛산자동차는 3년 내에 전 직원의 14%인 2만1000명을 줄이고 3개 조립공장 등 과잉설비를 폐쇄하는 대규모 경영재건계획을 작년 10월 내놓았다.

‘3개의 과잉’ 청산과 함께 새로운 산업육성을 위한 정부 재계 학계의 움직임도 본격화했다. 이마이회장은 “일본은 21세기에 발전할 정보기술 항공우주 생명공학 등 금융 분야에서 세계 1위는 못되더라도 2위는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정부가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위해 올해 ‘경제신생특별예산’에 포함한 5000억엔 중 절반인 2500억엔이 정보통신 등 ‘신규 유망산업’에 투입됐다.

첨단기술분야의 산학협력을 지원하는 정책도 곧 나온다. 통산성은 국공립대학에 대한 기업의 위탁 연구개발(R&D)제도를 대폭 개선하는 내용의 산업경쟁력 강화법안을 다음달 정기국회에 제출해 6월경 시행한다. 국공립대 교수가 국가적 프로젝트나 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업임원이나 사외이사를 겸직하는 것을 허용하고 대학 및 중소벤처기업의 특허료부담을 줄여주는 내용도 들어 있다.

미쓰이물산 데라시마 지쓰로(寺島實郞)종합정보실장은 “일본이 21세기에도 1차적 중점을 둘 산업은 제조업이지만 정보기술(IT) 등과 결합된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업이어야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도쿄〓권순활특파원>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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