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경산캠프 칩거 이승엽 "괴로워 죽겠어요"

  • 입력 2000년 1월 27일 19시 26분


“형, 저는 어떡해야 합니까. 괴로워 죽고만 싶습니다.”

26일 새벽. 프로야구선수협의회에 가입한 한화 최익성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의형제처럼 가까운 삼성 이승엽(24)이었다.

술도 잘 못마시는 이승엽의 목소리에는 취기가 잔뜩 배어 있었고 평소 친형 이상으로 따르는 최익성과 통화를 하자 마자 막 바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도 진심으로 가입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김)기태형을 비롯해 선배들이 다치는 게 두려웠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이승엽이 이처럼 괴로워한 이유는 24일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삼성 선수들의 선수협 가입불참을 공식발표하는 자리에 이승엽은 주장 김기태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었다. 굳이 그가 참석하지 않아도 됐지만 ‘팀을 위해’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구단에선 “순전히 자율적으로 회견장에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를 내세워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겠다는 구단의 의도였다는 게 중론이었다.

21일 선수협 창립총회에 참석해 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던 이승엽은 24일 기자회견을 한뒤 하루아침에 ‘변절자’로 낙인찍혔다.

그를 ‘하늘’처럼 여기던 팬들은 PC통신과 인터넷을 통해 일제히 비난을 퍼부었다. 이승엽 개인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의 90%이상이 그를 욕하는 내용이었다. 일부 팬은 ‘이승엽 은퇴 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일부 선수들도 등을 돌렸다. 그와 가장 절친한 두산 박명환은 이승엽의 백넘버인 ‘36번’을 의미하는 휴대전화 주소 36번에 저장돼 있던 전화번호를 지워버렸다.

이승엽은 현재 일체의 외부연락을 끊은 채 삼성의 경산숙소에서 칩거중이다.

아버지 이춘광씨는 “집과도 연락을 거의 안 할정도로 승엽이의 상심이 크다. 선배가 있고 구단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조직속에서 아들이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난해 홈런 신기록으로 수많은 팬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였고 ‘이승엽 신드롬’을 일으키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이승엽. 하지만 이제 팬들은 “더 이상 그를 ‘국민타자’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승엽과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해태 양준혁은 “물론 승엽이도 성인인 이상 판단을 제대로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를 기자회견 자리에 내세운 사람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 어린 선수가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게 지금 가장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선수협 파동’과 관련해 ‘최대의 희생자’로 떠오른 이승엽.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김상수기자>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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