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경제는 ‘철의 결속력’을 자랑하는 그룹, 특히 6개 그룹이 주도해왔다. 전전의 재벌에서 출발한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그룹 등 ‘재벌 3총사’와 전후 급부상한 후지 다이이치칸교 산와은행 등 3개 은행을 중심으로 한 신흥재벌이었다.
각 그룹은 계열사간에 사람 물건 자금 등에서 서로 도우며 팽창해왔다. 계열사 사장단 모임과 주거래은행 제도, 임원파견, 주식상호보유, 계열사간 거래는 그룹결속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세계화 정보화 등으로 촉발된 무한경쟁은 두 은행의 합병처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을 현실화했다. 개별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그룹과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는 이합집산과 ‘짝짓기’가 나타나고 있다. 이를 가능케 한 키워드는 ‘선택과 집중’이었다.
‘적과의 동침’이 활발해진 직접적 계기는 기존 그룹체제를 떠받쳐온 금융분야에 불어닥친 대재편의 바람이었다. 부실채권처리로 ‘체력’이 떨어진 은행들은 단독으로는 정보기술(IT)투자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부담하기 어렵다고 판단, ‘어제의 적’과 손잡고 덩치를 키우는 방법을 택했다.
스미토모은행 등의 합병발표 두 달 전인 작년 8월 다이이치칸교 후지 닛폰코교은행은 2002년 봄까지 경영을 통합하는데 합의했다. 세 은행은 이를 위해 9월 공동 지주회사를 세운다. 3개 은행의 통합으로 발족하는 ‘미즈호 그룹’의 총자산은 141조엔으로 세계 최대 금융그룹이 된다. 스미토모은행과 사쿠라은행도 합병후 총자산이 98조엔으로 늘어 미즈호 그룹에 이어 세계 2위의 금융그룹으로 도약한다.
도카이은행과 아사히은행도 10월 공동지주회사를 설립한다. 미쓰이신탁은행과 주오신탁은행은 4월 합병해 일본 최대규모의 신탁은행을 출범시킨다. 금융재편의 물결은 보험업계에도 파급돼 미쓰이 닛폰 고아해상화재보험은 2004년 사업을 통합한다.
니시카와 요시후미(西川善文) 스미토모 은행장은 “사쿠라은행과는 경쟁관계였지만 그룹보다는 우선 은행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판단에서 합병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금융분야에서 일어난 재편의 파도는 산업계 전반으로 확대됐다. 올해초 ‘재벌 3총사’의 종합상사인 미쓰비시상사 미쓰이물산 스미토모상사가 총무 인사 경리 정보시스템 등 관리업무의 통합에 합의했다. 이같은 합의는 사내의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최고경영자간 비밀회담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사사키 미키오(佐佐木幹夫) 미쓰비시상사 사장은 “취임 후 사내에 만연한 관례주의로 창조적 아이디어가 사장실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중간에서 걸러지는데 놀랐다”며 “이번 합의가 이런 경직된 사내풍토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분야의 숙적인 NEC와 히타치제작소도 손을 잡았다. 두 회사는 차세대 D램 제품을 개발 설계할 새 회사를 작년말 공동출자로 설립해 4월부터 사업을 시작한다.
일본 반도체업계가 사업을 통합하는 것은 처음이다. 삼성전자 등과 맞서려면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두 회사의 통합을 낳았다. 그동안 부분제휴에 머물러온 도시바와 후지쓰도 협력을 대폭 강화할 방침이다. 통신분야에서도 교세라그룹의 DDI와 도요타자동차계열의 IDO, 국제전화회사인 KDD가 일본 최대통신사 NTT에 대항하기 위해 올가을 경영을 통합한다.
자동차업계에서는 해외 경쟁업체와 손잡는 일이 늘어났다. 미쓰비시자동차는 작년 10월 스웨덴 볼보자동차와 자본제휴를 발표했다. 도요타자동차는 미국 GM과 연료전지차 등 환경기술분야에서 손을 잡았고 독일 폴크스바겐과는 연비효율이 높은 직접분사형 엔진개발에 공동 착수키로 합의했다. 후지중공업은 작년말 GM과 기술 및 자본 제휴계약에 서명했다. 닛산자동차는 프랑스 르노자동차에 사실상 경영권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살아남기’에 나섰다.
경쟁력강화를 위해 그룹과 국경을 뛰어넘는 짝짓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우지이에 준이치(氏家純一) 노무라증권 사장은 “3개 은행 통합과 스미토모 사쿠라은행 합병 등을 통해 일본 금융 및 산업계의 ‘전후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며 “이런 대재편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쿄〓권순활특파원>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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