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교통선진국]이항나/"웃음으로 욕설 받아"

  • 입력 2000년 2월 1일 10시 04분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차는 밀리고 마음이 급해 전투적인 자세로 운전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날도 아마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편도 4차로 도로에서 1차로로 주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 차로가 잘 뚫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빨리 백미러로 뒤를 확인하고는 방향표시등을 넣고 막 차로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3차로로 주행하던 한 승용차가 난데 없이 차로를 바꿔 들어오는 게 아닌가!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서로 부딪히는 것을 피했다. 너무 놀랐고 다음은 화가 났다. 순간 서로간에 잘못이 있지만 여성 운전자인 것을 확인하고는 창문을 내리고 욕설을 퍼붓는 경우를 많이 당한 탓에 나의 내면은 반사적으로 ‘호전적인 에너지’로 전환됐다.

이번엔 내가 먼저 선제 공격을 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래서 신호대기에서 만나자 창문을 내리고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것 아니예요, 사고 날 뻔 했잖아요” 라고 ‘무식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상대는 너무나도 여유있는 미소를 띠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내가 화를 내면서 소리친 것 정도는 남자의 아량으로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50은 돼 보이는 대머리 아저씨는 자기도 놀랐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순간 나는 너무 무안하고 말로 표현 할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만화에서 너무 당황하거나 창피해서 갑자기 사람이 쑤-욱 작아져버리는 그런 그림 같다고나 할까.

그래! 이런 사람들도 있다. 모두다 그렇게 욕설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런 사람이 돼야 하지 않을까? 그날 이후 난 짜증나는 ‘교통 지옥’ 속에서도 가끔 그 멋쟁이 대머리 아저씨를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이항나 (연극배우·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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