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이 하늘에 지구를 지배하는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태양과 행성이 하늘의 특정한 위치에 있을 때 지구상에서 전쟁 홍수 지진 기근 등 재앙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옛날에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태양이 1년간 선회한 것처럼 보이는 원형의 띠를 12부위로 나누고 고유한 명칭을 부여했다. 이른바 12궁은 양 황소 전갈 물고기 따위의 동물과 처녀 물병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옛사람들은 12궁도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전쟁이나 자연 재해를 예측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점성술은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개인의 출생시 별자리와 운명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도표인 천궁도(horoscope)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점성가들은 출생 천궁도를 작성해 개인의 기질과 운명을 점친다. 말하자면 개인의 삶은 그가 태어난 계절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점성술은 르네상스까지 전성시대를 누렸다. 거의 모든 위대한 과학자 천문학자 철학자가 점성술을 연구하거나 수용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과학의 발달로 점성술은 미신 또는 비술로 격하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점성술에 대한 인기가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예컨대 1983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점성술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 재직시 그의 부인이 남편이 국사를 결정하는 길일을 택하기위해 점성가와 상의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쨌거나 점성술은 서양의 대표적인 사이비 과학이다. 그런데 권위 있는 영국 과학잡지 ‘뉴 사이언티스트’가 신년호 특집에서 점성술에 우호적인 글을 게재하여 눈길을 끌었다. 이 논문은 점성술의 주장처럼 사람의 기질이 계절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결과를 상세히 소개하였다.
먼저 운동선수에서 흥미로운 계절 요인이 확인되었다. 1991∼92년 시즌에 활약한 영국 프로축구 선수는 여름철보다 9∼11월에 태어난 사람이 두 배 많았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 각각 실시된 연구에 따르면 의과 대학생들은 4∼6월에 유난히 생일이 많았다. 신장과 체중에 대한 계절적 상관관계 역시 증거가 많다. 1998년 오스트리아 군대에 10년간 징집된 50만명의 18세 청년을 대상으로 평균신장을 조사한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3∼5월 출생한 남자가 9∼11월생보다 평균 6㎜ 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장 진기한 계절적 영향은 과학자 세계에서 확인되었다. 진화론 등 논쟁의 소지가 많은 이론을 남보다 먼저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10∼4월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는 연구결과가 이미 ‘네이처’지에 발표된 바 있다. 개인 기질과 출생 시기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사례가 속출함에 따라 과학자들은 계절 요인이 개인의 질병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주목했다.
미국에서 1929년부터 70년간 정신분열증과 조울병에 관련되어 발표된 문헌을 검토한 결과 12∼4월에 태어난 사람이 이러한 질병에 훨씬 많이 걸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요컨대 태어난 계절에 따라 당뇨병 관절염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대량의 자료를 처리하여 어떤 질병의 전모를 파악하는 의학을 역학(疫學)이라 한다. 말하자면 점성술의 영역에 머물던 계절 요인이 의학의 연구 대상으로 넘어간 셈이다.
점성술은 천문학을 태동시켰고 이제는 역학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과학과 비술이 멀고도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하는 비과학적인 생각이 퍼뜩 스쳐간다.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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