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미술계 우려-찬사 교차▼
백남준이 구겐하임을 점령했다는 표현은 세계적 예술가들이 눈독을 들이는, 제도권 미술의 상징적 기구인 구겐하임의 첫 밀레니엄 이벤트를 미국 미술계의 거장이 아닌 한국인 백남준이 차지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밀레니엄 첫 전시가 비디오 및 레이저 등 하이테크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예술과 하이테크의 지나친 랑데부에 대한 우려와 찬사가 대등하게 교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의 21세기 지표가 여전히 전자시대의 각종 미디어가 지배구조를 이루게 될 것을 예고한다.
전시의 제목은 ‘백남준의 세계’(The Worlds of Nam June Paik). 매우 평이하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 존 핸하르트와 백남준 간의 논쟁에서 나온 타협이다. 백남준은 당초 구겐하임이 제안한 ‘백남준 회고전‘이라는 제목을 거부하였다. 거부 이유는 우선 그 자신의 회고전이 82년 휘트니미술관에서 이미 열렸고, 회고전이란 원래 영화의 속편 같은 것이어서 성공률이 적을 뿐더러 재탕, 삼탕 하는 이미지를 주기 쉽다는 것이었다.
원래 백남준은 전시제목을 ‘후기 비디오’로 해줄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겐하임측은 지나치게 이론적인데다가 비디오예술의 후기적 특징을 뒷받침할만한 대안이 미진하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백남준의 세계’라는 무난한 제목으로 결정된 것 같다. 그러나 백남준은 전시개막 이후에도 이론가들이나 작가들에게 이번 전시는 자신의 ‘후기 비디오’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전시前 제목 싸고 논쟁도▼
이번 전시는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백남준의 회고전 거부의사에도 불구하고 이미 공개된 백남준의 ‘출세작’을 다시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며, 다른 하나는 90년대 초부터 공들여온 레이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작품들이다.
비디오예술 40년을 결산하는 옛 작품들은 1963년 비디오예술의 시작에서부터 플럭서스 시대의 퍼포먼스, 그리고 비디오조각과 테이프 등이다. 여기에는 백남준이 일본인 전자기술자 아베 슈야와 함께 최초로 개발한 비디오이미지 합성기를 비롯하여 70년대 비디오조각과 설치의 결정판인 ‘텔레비전 달’과 ‘TV 시계’, ‘TV 첼로’, ‘TV 정원’, ‘비디오 물고기’ 등이 구겐하임의 원형전시장에 각 층별로 전시되었다.
비디오테이프작품들은 그의 대표적 출세작인 ‘글로벌 그루브’와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 바이 키플링’ 등이 구겐하임 원형전시장 전면에 설치된 대형화면을 통하여 관객과 만난다.
이번의 화제작은 레이저 작품 ‘동시적 변조’(Modulation in Sync)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원형 전시장을 가득 메우며 공간을 압도하는 이 작품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가 가져오는 변화와 조정, 그리고 동서양이 모두 정보의 동시성에 산다는 매체확산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구겐하임미술관 1층에서부터 7층 높이의 천장까지 연결된 사다리(작품제목은 ‘야곱의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이용하여 레이저 광선을 쏘는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서 레이저가 비디오의 새로운 대안임을 주장하는 백남준의 야심작이다.
이 레이저 광선은 구겐하임 미술관 천장에 설치된 스크린에 비치면서 30여 가지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연출한다. ‘달콤하고 웅장하다’(Sweet and Sublime)는 부제가 달려 있다. 백남준과 레이저 기술자 노먼 발라드가 함께 연구한 걸작이다.
▼새로운 대안은 레이저▼
이번 전시는 하이테크 예술의 시조중 한사람이라는 그의 미술사적 위치를 견고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 또 비디오예술의 선구자로서 비디오의 후기적 대안을 레이저로 설정하고 있어 그 성공여부가 백남준의 또 다른 예술적 시험무대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96년 중풍으로 쓰러져 투쟁하고 있는 백남준을 격려하면서 제2의 예술적 삶을 독려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용우(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