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래된정원(346)

  • 입력 2000년 2월 10일 19시 53분


여론은 불법적인 건축 변조와 위험 진단을 무릅쓰고 붕괴될때까지 고객을 대피시키지 않은 채 영업을 강행한 기업주를 질타했다. 그러다가 벼라별 묵은 사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원래 식민지 시대에 일제의 정보 끄나풀이었다.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나중에 만주에서 일본 영사관의 문관이 되었다. 해방되어 귀국해서 방첩대에 근무했고 전쟁 중에는 미군에 배속되어 중국군 포로 심문관이 되었다. 유창한 중국어와 만주의 항일연군 맥락을 이해하는 전문성이 발휘되었다. 그는 정보부 창설에 관여했고 미군의 연락관을 했으며 당시의 기지창이던 알짜의 땅을 불하받았다. 그리고 아파트를 짓고 백화점을 지었다고 신문은 자세하게 써놓았다. 남에서는 독재와 근대화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으며 북에서는 그맘 때부터 대대적인 굶주림과 탈북이 진행되었다. 분단시대의 마지막 단원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주변부의 혼란과 변화는 어쩌면 더욱 깊숙이 오래 이행될지도 몰랐다. 내가 할 일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아마도 일이 남아있다면 그건 바로 일상과의 씨름이다. 그리고 어느 해 여름 혹시나 하면서 기다렸다가 한 달이 넘도록 서로가 욕을 퍼부었던 유월의 그날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희망을 가졌다가 절망했다가 김이 새서 모두 파편화시켜 버렸다.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종교인, 실업자…. 도무지 끝나질 않을 것처럼 주워 섬기다가 넥타이 부대를 끼워 넣었다. 그때에도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이 시민의 탄생이었는데도.

이제 감옥에서 나온지 한 달도 못되었는데 세상은 구제금융 대란이었다. 나는 독방에서 갖고 나온 속옷 몇 벌 뿐이라 가난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누구 말처럼 전깃줄에 앉은 참새도 다른 무리가 날아오면 일시에 날아올랐다가 다시 맞춤한 간격으로 재편성해서 앉는다. 공간의 혼란이다. 이 잠깐 동안의 날아 앉기에 잽싸게 끼우지 못한 것들은 다른 곳으로 뿔뿔이 날아가버린다. 이를테면 나는 혼자가 아니리라.

갈뫼에서 여섯째 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짐을 꾸렸고 내가 읽었던 윤희의 노트들을 가방 속에 넣었다.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밤을 새워서인지 혓바닥이 둔탁하고 면 가닥이 씹히지도 않고 입천장에서 맴돌았다. 독방에 있을 때처럼 설거지 해놓고 걸레를 빨아서 방바닥을 깨끗이 닦아냈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에 마루 방에서 그네가 그렸던 예전 나의 초상을 본다. 젊은 나의 초상을 보는 게 아니라 그네가 써놓았듯이 저 뒤편에서 내 어깨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나이든 어머니 윤희를 바라본다.

다녀 올게.

나는 타향으로 출발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순천댁네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과수원 길을 걸어 나와 다리목에서 버스를 타고 처음 찾아오던 모양 그대로 나는 갈뫼를 떠났다.

너희들은 어디로 날아가느냐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누구로부터 떠나왔느냐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이 함께 있은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조금 아까부터

그러면 언제 그들은 헤어질 것이냐고

이제 곧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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