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박하사탕'과 '철도원'

  • 입력 2000년 2월 14일 19시 31분


“나 돌아갈래.”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는 달려오는 열차에 맞선 채 온몸으로 절규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돌아가려던 그 곳, 부서질 대로 부서진 영혼을 안식(安息)시킬 수 있는 먼 세월의 뒤편은 어디쯤이었을까. 영화는 길게 이어진 기찻길을 배경으로 20년 세월을 거슬러 여행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로는 인생이 그러하듯 어차피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길이며 생(生)의 어느 이정표마다 문득문득 되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더럽혀진 ‘착한 손’▼

고단하고 얼룩진 삶, 스트레스와 숙취에 전 중년의 사내가 새벽녘 갈증과 소변을 참지 못해 들어선 화장실. 쏟아지는 형광등 빛에 창백하게 떠오르는 거울, 그 속에 갇혀 있는 낯설게 망가진 얼굴. 사내는 진저리치며 신음한다. “이렇게 사는 게 아냐.” 이게 어디 오늘을 사는 한 사내만의 독백이겠는가. 인생에는 여러 길이 있다고 하지만 어느 길이냐가 반드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는 어쩌다 주어지는 것이고 한참을 걸어왔을 때 돌아보면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있을 뿐이다.

자살하기 위해 권총을 품에 넣고 다니던 영호는 “내 인생을 망가뜨린 놈 한 놈은 죽이고 죽고 싶은데 그런 놈들이 너무 많아 어떤 놈을 죽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20년 전 영호는 사진사를 꿈꾸며 하루에 박하사탕 천 봉지를 싸야 하는 들꽃 같은 처녀 순임을 사랑하던 순수한 청년이었다. 그런 영호가 군에 입대해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됐다가 오발로 한 여학생을 숨지게 하고 그 뒤 고문경찰관으로 변신한다. 어느 날 첫사랑의 여인 순임이 찾아오고 영호의 못생겼지만 ‘착한 손’을 얘기한다. 그러나 이미 광주에서 여학생의 피를 묻히고 고문에 못 이겨 싸지른 운동권 젊은이의 똥을 묻힌 손. 그 손으로는 차마 순임을 붙잡지 못한다는 것을 영호는 안다.

특별히 착할 수도 악할 수도 없는, 그러기에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가며 때로는 허세를 부리고 때로는 위악적(僞惡的)이며 그러면서도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한 조각 아픔만은 떨쳐낼 수 없는 영호에게 ‘광주’도, 고문경찰관도 스스로 택한 길은 아니다. 그저 한 시대의 흐름이, 추악한 세월의 바람이 던져넣은 길이다. 경찰복을 벗고 사업을 하며 오른 주가에 킬킬거리고 아내의 간통 현장을 덮치고는 회사 여직원과 철교 밑 공터에서 카섹스를 벌이는 영호의 머리 위로 열차가 지나간다. 이때 열차가 달리는 길은 너무 멀리 떠나온 길이자 되돌아가고 싶은 길이다. 감독 이창동은 그 길로 관객을 안내한다. 고통스러운 돌아보기다. 하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 제대로 된 세상을 비추는 빛이기도 하다.

▼늙은 역장의 회한▼

인생의 돌아보기가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추억이란 때로 애잔하게 다가와 인생의 힘든 어깨를 감싸안는다. 일본 영화 ‘철도원’은 흰빛의 영화다. 폭설로 덮인 들판을 달리는 고물열차, 퇴락한 역사(驛舍) 지붕에 쌓이는 눈, 눈발속에 홀로 서있는 늙은 역장의 모습들이 죽음과 이별, 슬픔과 외로움의 색깔로 풍경을 이룬다. 정년퇴임을 앞둔 외딴 시골 종착역의 역장 오토는 평생을 철도밖에 모르고 살아온 사내. 그는 역을 지키느라 젖먹이 딸의 죽음도, 병약한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다. 한때 번창했던 탄광이 문을 닫은 후 마을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승객이 끊긴 철도도, 낡은 역사도 곧 쌓인 눈속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오토는 그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 그에게 추억은 회한이자 따뜻함이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환영으로 나타난 죽은 딸 앞에서 오토는 말한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껴. 난 아내와 딸에게 몹쓸 짓을 했는데도 사람들은 모두들 내게 잘 대해줬어.”

총선바람에 소란스러운 정국이 뒤엉킨 세상이다. 바른 정치란 우리의 일상적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그런 정치가 한번쯤 와야할 때가 아닌가.

youngj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