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설수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한 일간지 기자에게 사사로이 한 말이 여과없이 보도되면서 불거졌다. "요즘 국내 벤처 기업들은 정치한 사업계획서나 아이템도 없이 벤처붐을 틈타 무턱대고 자금만 끌어당긴다. (중략) 이런 풍토가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95%의 벤처기업이 무너지고, 돈을 날린 투자가들이 속출할 것"이라고 그가 경고했다는 내용이었다. 보도가 나가자마자 안연구소의 전화통에는 불이 났다. 옳은 지적이었다는 격려 전화도 많았지만, "잘 조성돼 가던 벤처기업 붐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비판하는 전화도 적지 않았다.
실상 이 보도에는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았다. "현재 벤처기업들 중 앞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기업은 5% 정도"라는 것이 안소장의 실제 발언 내용이었다. 이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신생 벤처기업들 사이에서도 이미 정설로 통한다. 벤처 자본가들도 그 5%의 대성공을 바라고 거금을 쏟아붓는 '모험' - 그래서 '벤처' 기업 아닌가 -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95%가 망할 것'이라고 뒤집어 말함으로써 충격이 배가됐다. 더욱이 5%가 성공한다는 것이, 꼭 나머지 95%의 도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도외시됐다.
안소장은 "신문보도 파문이후 많이 반성했다"라고 말한다. "도전할 일도 많고 내 할 일도 쌓여 있는데 나도 모르는 새 긴장이 풀렸던 것 같다. 긴장이 풀리다 보니 방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남의 일에 참견하게 되고 (중략) 앞으로는 주위 신경 안쓰고 오직 이 회사를 반석 위에 올리는 일에만 집중하려 한다."
문제는 주위 사람들의 그의 바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를 조용히 놓아 두기에는 그의 사회적 위상이나 영향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가 창업한 안연구소의 경영 사례와 그 결과 또한 더없이 모범적이다. 국내 벤처기업들의 동향에 대한 그의 참여와 간섭은 이제 불가피한 '의무'처럼 여겨진다. "나모인터랙티브의 박흥호 사장, 다음커뮤이케이션의 이재웅 사장 등을 만났는데, 그들도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더라"고 그는 말한다. 이리저리 불려다니고, 강연하고, 인터뷰하고 - 기자도 그의 시간을 빼앗은 셈이다 - 청탁 원고 쓰느라 정작 '본업'인 회사 경영에는 전념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지난 한 해 동안 적지 않은 사업들을 벌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운영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급부상한 리눅스(Linux)의 응용 프로그램 개발 및 유통을 목적으로 다른 우량 벤처기업들과 함께 합작 법인인 '앨릭스'(Allix)를 설립했는가 하면, 정보보안 시스템업체·네트워크 업체 등과 힘을 합쳐 '코코넛'(Coconut)이라는 보안 서비스 기업을 출범시켰다. 국내 10여개 소프트웨어 기업을 회원사로 거느린 '소프트웨어벤처협의회' 회장으로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 살리기에 힘을 쏟기도 했다. "몸이 피로하기는 하지만 뭔가를 새로 만든다는 것은 늘 재미있는 것 같다"라는게 그의 말이고 보면, 늘 분주한 것은 그의 태생적 기질인지도 모르겠다. 또 한 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내고야 마는 - 그것도 제대로 -그의 성실성 때문인지도.
그렇다고 그가 안연구소 경영에 등한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지난해 114억원의 매출을 올렸을 뿐 아니라 세후(稅後) 순이익만도 45억원이나 기록했다. 일반 기업의 매출 규모로 보면 미미해 보일 수도 있지만 패키지 소프트웨어업체의 규모로는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이는 국내 패키지 소프트웨어업체들 중 지난해 100억 이상의 매출을 올린 곳이 한글과컴퓨터와 안연구소 두 곳뿐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더욱이 안연구소는 국내 컴퓨터 백신 시장의 80%를 점유, 절대 강자임을 과시했다.
따지고 보면 안소장의 뜻하지 않은 '외도'도,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흥미를 느끼고, 또 일단 빠져들면 속수무책으로 열중하는 그만의 기질로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부산고를 거쳐 서울대 의대에 다니던 시절, 그는 친구의 하숙방에서 우연히 컴퓨터를 만났다. 이 새로운 기계의 매력에 그가 빠져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컴퓨터와 관련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는 사이 그는 전문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물론 본업인 의사 생활을 계속 병행하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전업(轉業)의 결정적 계기를 만나게 된다. 파키스탄에 사는 어떤 형제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제작된 '브레인'(Brain)이라는 이름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공교롭게도 그의 디스켓에 침입해 애써 모아둔 자료들을 날려버린 것이다. 1988년이었다.
기가 막혔다. 듣도 보도 못한 작은 불청객 프로그램 하나가 오랫동안 공들여 모아둔 파일 자료를 한 순간에 못쓰게 만들어버리다니…('컴퓨터 바이러스'라는 은유는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이런 악성 프로그램들을 퇴치할 방법은 없을까? 아니, 그보다 한 발 앞서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국내 컴퓨터 백신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V3'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안연구소의 V3 시리즈는 10여종으로 불어났다. V3프로2000, 넷웨어용 V3, 솔라리스용 V3, 윈도NT용 V3 등 그야말로 컴퓨터 바이러스가 침입할 수 있는 모든 통로마다 V3가 버티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일반 데스크톱 차원의 정보를 암호화하는 보안 시스템 앤디(EnDe)를 개발, 단순한 컴퓨터 백신업체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안소장은 "올해야말로 안연구소가 기로에 선 해"라고 말한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뻗어가느냐, 아니면 작은 구멍가게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인가를 결정짓는 해"라는 것. 코스닥(KOSDAQ) 상장은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그는 이를 위해 ▲고객 감동 ▲스피드 경영 ▲해외 진출 등의 세 가지 목표를 정했다. 이는 회사의 올해 목표이자, 안소장 자신의 개인적 목표이기도 하다. 안소장은 "지난해 V3가 국내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신속한 업데이트와 효율적인 고객 서비스"였다며 "올해는 이를 더욱 체계화하고, 중국 일본 등 해외 진출을 모색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지난 해 말, 그는 온몸에 신경성 피부염이 번져 고생했다. 격무와 스트레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는 2년 전에도 격무를 이기지 못하고 간염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스스로를 극한까지 채찍질하는 성격 탓인 듯하다"는 그의 자가진단. 올해 그의 '자기 채찍질'은 어디까지 갈까? 또 어떤 빛나는 성과로 이어질까?
김상현<동아닷컴 기자>dotco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