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실세'의 '물갈이' 주도?

  • 입력 2000년 2월 18일 19시 23분


한국정치의 키워드를 살펴보면 그 더딘 발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해방이래 오늘날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동어반복이다. 독재 민주화 부정 부패 축재 비리 음모 의혹 배후 암투 사주(使嗾) 측근인물 같은 음습한 말들. 대통령의 인치(人治)를 겨냥한 민주주의 공세거나, 합리성 과학성과는 거리가 먼 주관적 감정과 추상(抽象)의 언어들이다. 새 천년 아침까지도 정치를 소개하는 단어는 어두운 빛깔의 이런 것들이다. 지나 새나 이렇게 흘러가는 정치가 또 있을까. 딱한 정치 ‘지진(遲進)’이다.

▷근년의 정치 키워드로 ‘실세(實勢)’ ‘물갈이’를 꼽을 수 있다. 실세라는 말은 3공때 까지만 해도 별로 안쓰였던 것 같다. 그 무렵에는 ‘실력자’‘측근’으로 통했다. 80년 신군부의 장군들이 갑자기 힘을 잡으면서, 묵은 시절의 노회한 ‘구렁이 실력자’ 혹은 측근과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또 청와대와 먼 거리에서도 실력을 행사하는 자를 ‘측근’이라고 하면 거리감이 맞아떨어지지 않기도 했다.

▷실세의 그런 뜻은 실상 사전에도 잘 안나온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실세란 대체로 ‘실제의 세력 또는 기운’‘실제의 시세’다. ‘그 쪽의 실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거나, ‘실세 금리가 얼마?’라고 할 때 쓸 뿐이다. 일본에는 아예 그런 단어가 없다. 그러니 권력자를 등에 업거나 그 주변에서 파워를 행사하는 ‘실세’는 한국 신문 방송에서 ‘측근’에 대응하는 말로 굳혀 버린 셈이다.

▷세대교체의 뜻으로 통하는 ‘물갈이’도 오래된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옛 사전에는 물갈이를 ‘논에 물을 넣고 가는 것’이라고만 되어있다. 최신 사전이라야 어항과 물고기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고인 물을 갈아주는 것’으로 한 항목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은 온통 정치판의 사람 바꾸기로만 통한다. 어항의 썩은 물보다 정치 물갈이가 더 급하다는 인식일까. 그런데 여야 정당의 공천 발표를 놓고 각당의 ‘실세’들이 ‘물갈이’공천을 주도했다는 말이 나온다. 실세를 통한 보스 지배, 친정(親政)체제 강화라는 소리도 들린다.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김충식 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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