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년의 정치 키워드로 ‘실세(實勢)’ ‘물갈이’를 꼽을 수 있다. 실세라는 말은 3공때 까지만 해도 별로 안쓰였던 것 같다. 그 무렵에는 ‘실력자’‘측근’으로 통했다. 80년 신군부의 장군들이 갑자기 힘을 잡으면서, 묵은 시절의 노회한 ‘구렁이 실력자’ 혹은 측근과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또 청와대와 먼 거리에서도 실력을 행사하는 자를 ‘측근’이라고 하면 거리감이 맞아떨어지지 않기도 했다.
▷실세의 그런 뜻은 실상 사전에도 잘 안나온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실세란 대체로 ‘실제의 세력 또는 기운’‘실제의 시세’다. ‘그 쪽의 실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거나, ‘실세 금리가 얼마?’라고 할 때 쓸 뿐이다. 일본에는 아예 그런 단어가 없다. 그러니 권력자를 등에 업거나 그 주변에서 파워를 행사하는 ‘실세’는 한국 신문 방송에서 ‘측근’에 대응하는 말로 굳혀 버린 셈이다.
▷세대교체의 뜻으로 통하는 ‘물갈이’도 오래된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옛 사전에는 물갈이를 ‘논에 물을 넣고 가는 것’이라고만 되어있다. 최신 사전이라야 어항과 물고기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고인 물을 갈아주는 것’으로 한 항목을 더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은 온통 정치판의 사람 바꾸기로만 통한다. 어항의 썩은 물보다 정치 물갈이가 더 급하다는 인식일까. 그런데 여야 정당의 공천 발표를 놓고 각당의 ‘실세’들이 ‘물갈이’공천을 주도했다는 말이 나온다. 실세를 통한 보스 지배, 친정(親政)체제 강화라는 소리도 들린다.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김충식 논설위원>sear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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