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송영/바둑발전 디딤돌 '루이 國手'

  • 입력 2000년 2월 23일 19시 11분


중국 상하이 출신 여성기사 루이 나이웨이 9단이 드디어 한국 국수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바둑에 조금만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충격으로 받아들일 만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루이가 역시 프로기사인 남편 장주주 9단과 함께 작년 한국기원 소속 기사로 입문했을 때 이미 심상치 않은 예감을 갖긴 했지만 지금 한참 세계 최강을 구가하는 한국바둑의 본마당에서 설마 이렇게 빨리 안방의 상석을 차지하게 될 줄은 몰랐다.

루이는 등장 초기부터 강한 기력 외에도 기사로는 드물게 여러가지 주변 얘기들로 많은 화제를 제공했다. 톈안문 사태와 연루돼 본의 아니게 십년 넘는 유랑생활을 하게 된 남편, 92년 일본 도쿄에서 연인이었던 장주주 9단과 만나 냉수 한 그릇을 놓고 결혼식을 올린 것 등. 이런 로맨틱한 사연들이 그들을 화제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마음껏 바둑을 두고 싶다.’ 이것은 남편과 함께 미국 일본 등지를 오가며 사실상 유랑생활을 하던 시절에 루이가 외친 말이다. 원인이 무엇이건 프로기사로서 바둑 둘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통일 것이다. 당시 이들에게 적지 않은 연민을 느꼈던 필자는 한국기원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바둑 둘 마당을 제공했다는 기사를 신문 한귀퉁이에서 읽고 몹시 흐뭇한 기분을 느꼈었다. 일본기원에서도 거부했다는 루이같은 위험한 강자를 받아들인 그 결정은 한국 바둑의 여유와 성숙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이번 국수 도전 3번기는 한판 한판이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의 연속이었다. 대마 사활이 오락가락하는 중반의 전개상황은 일반 관전자들에게는 바둑의 백미를 음미하는 흠미만점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바둑 전개상황과 그 결과에 사람들이 이처럼 촉각을 곤두세우고 각양각색의 흥분된 반응을 보인 경우는 아마 거의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의 대결, 사상 최초의 외국인 타이틀 도전 등 이런 요소들이 이 대국의 흥미를 돋우고 여기에 두 대국자의 전투적 취향이 흥미를 배가시켰다. 바둑황제라는 조국수에 맞서 깡마르고 왜소한 여성기사 루이가 당당하게 대적하는 모습은 바둑 내용을 차치하고 그 풍경만으로도 흥미진진한 그림이었다. 도대체 저 왜소하고 순해보이는 여성의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물론 실력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루이의 철저한 준비, 평소의 성실한 생활자세에서 그런 힘이 배양되었을 것이다.

중국 여성이긴 하지만 루이에게서는 배울 만한 점이 많은 것 같다. 벌써 사이버 바둑판에서는 루이풍의 싸움 바둑이 유행할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잠자던 우리 여성바둑에도 루이가 적지 않은 자극을 준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루이는 우리 여성바둑 발전에 중요한 촉매제 구실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결과를 두고 ‘하필이면 왜 국수냐’라는 짜증조의 불평이 일부 팬들 사이에서 들린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일시의 감정은 이해못할 것도 없지만 그것은 지극히 편협한 단견이다. 조치훈 기성이나 조선진 혼인보가 일본 바둑 안방을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비록 일시나마 이런 불평을 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박세리나 박찬호가 미국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를 것이 없다.

근래 한중일 바둑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바둑의 세계화가 빠르게 촉진되고 있으며 이제 승자의 국적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시대로 가고 있다. 그동안 한국바둑은 지는 것을 잊을 정도로 호황 속에 안주해온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기는 것은 당연하고 지는 것은 사고라고 느끼는 경향마저 팬들 사이에는 있는 것이다. 도리어 이번 국수위 교체를 계기삼아 우리 바둑은 새로운 천년을 설계하는 발전과 변화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큰 승부를 끝낸 뒤 두 대국자가 머리를 맞대고 복기하는 장면, 특히 조국수의 의연한 모습은 대승부사의 풍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보기좋은 장면이었다. 루이의 개인적 성취에 박수를 보내고 조국수의 변함없는 정진을 기대한다.

송영(작가)

<고진하기자>j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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