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는 최근 은행 이사진 구성에서 ‘사외 이사제도’를 선호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미국에서는 몇년전까지만 해도 사외 이사제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 돈을 투자한 사람만이 회사를 아낄 줄 안다는 원칙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미국은행의 경영진과 이사진은 매년 개최되는 주주총회에서 최소한 100주 이상 주식을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서 이사진을 선정한다. 외부 전문가를 이사진으로 영입하더라도 의무적으로 100주 이상의 주식을 소유하게끔 강제 규정을 한때 둔 일이 있다.
한국 정부는 재벌 대주주의 입김으로부터 은행 경영의 독립성을 보호하기 위해 사외이사 제도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진정한 의미에서 은행경영의 독립성은 정부의 입김을 받지 않고 이사진을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한국의 거의 모든 은행들이 정부의 공적 자금투입으로 회생됐고 사실상 대주주가 정부이기 때문에 이사진과 경영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결정권이 정부와 관료들의 손에 달려있다.
한국이 경제위기를 겪은 이유는 재벌기업의 문어발씩 확장에도 있지만 직접 장사를 해본 경험이 없는 관료들이 만들어낸 국가중점 지원 산업이라는 터무니없는 목표설정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은행 이사진을 관료들의 입김으로 뽑는다면 금융산업에 대한 정부의 간접적인 지배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은행의 사외이사 제도는 은행경영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떠난 중립적이며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을 이사진에 영입하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은행경영의 중립성이란 은행 이사들에게 은행 경영진과 똑같은 권리와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사진과 경영진의 ‘자기몫 챙기기’가 은행부실의 큰 요인이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미국은행에서 이사로 피선되면 권리는 없고 책임만 진다. 매년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뽑고 이사들은 매달 개최되는 이사회에 참석해 중요정책을 결정한다. 일정 액수 이상의 대출은 반드시 이사회를 통과해야 한다. 대출결정에 찬성한 이사들이 대출승인란에 서명하게 되면 반대한 이사들은 반대사유를 이사회 회의록에 남긴다.
대출이 부실로 판정되면 책임을 이사들에게 묻는다. 경영이 부실해도 경영진과 더불어 이사 또한 무한책임을 진다. 말하자면 권리는 없고 책임만 큰 자리다. 미국은행은 이사진들에게 고정 급료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쉽사리 은행이사직을 수락하지 않는다. 은행이 문을 닫거나 불법행위를 저질렀을 때도 주주와 고객들은 경영진과 이사진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은행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이사로 모시는 사외 이사제도가 은행을 자기 사업처럼 아끼는 사람 가운데서 뽑는 사내 이사제도보다 경영 효율면에서 우수하다는 경험적 증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상 거수기라고도 불리는 ‘고무도장’은 밖에서 모셔온 사람들 가운데 더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은행의 대주주로 행세하는 관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사진을 친정부 인사로 채움으로써 은행 경영진의 반행정부적 결정에 제동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긴 뿌리가 땅속 깊이 잘 뻗어나가야 한다. 은행 조직에서 이사진은 나무의 뿌리와 같은 존재이다.
바른 은행경영이란 정부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고객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정부의 뜻보다는 고객의 숨은 뜻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을 은행 이사진으로 모셔야 한다.
이태영(미국 시카고 메트로폴리탄 은행그룹 수석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