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의 서툰 정치솜씨가 거의 죽어가던 정치인 여럿을 되살려놨다는 얘기도 들린다. 민주당의 공천후유증은 한나라당의 공천파문과 신당움직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시끄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나라당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지 모른다. 거기에서 우리는 앞으로 3년 더 나라를 이끌어 갈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권력실세들의 통치기법과 그 한계를 읽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교동 이너서클 ▼
바로 몇 개월전 국민회의가 신당을 만든다며 참신하고 개혁적인 인사를 발기인으로 영입했을 때, 대표적인 케이스가 신부인 이재정(李在楨)성공회대 총장이었다.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해온 이총장은 신당의 총무위원장을 거쳐 민주당 정책위의장에 올랐다. 총장도 그만두고 공천심사위원으로 들어갔지만 현실정치의 높은 벽 앞에서 무력감(無力感)만 절감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신당에 참여해 개혁정당의 색깔을 돋보이게 했던 재야출신들이 공천에서 거의 모두 탈락했다. 공천심사에 문제가 있다며 재심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그 자신은 전국구후보로 배려될 것이란다. 그를 잘 아는 옛 동지들은 “당신같이 순진한 성직자가 더 있을 데가 못되는 것 같으니 이젠 그만 나오라”고 하지만 그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아직 모른다.
민주화투쟁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 소설가 유시춘(柳時春)씨. 이총장과 함께 1차 신당 창당 추진위원으로 영입돼 서울주변 신도시에 공천신청을 냈다가 떨어지고 탈당했다. 유씨가 최근 한 일간지에 기고한 ‘낙천체험’은 절규에 가깝다. 어느 지도자보다 친여성적인 김대통령이 여성도 지역구에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격려했기에 고심 끝에 용기를 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공천이 과학적 분석에 의한 투명하고 공정한 것이었다는 지도부의 말은 거짓말이다. 공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동교동 이너서클’은 정치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을 외면했다.”
한때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으로 김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모셨던 이강래(李康來)씨. 전북 남원-순창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한 이씨는 이번 공천이 “동교동계 핵심실세 부인의 치맛바람에 좌우된 정실공천의 전형”이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 대변인으로 일했던 이영일(李榮一·광주 동)의원은 이번 호남지역선거는 ‘동교동계 대 반(反)동교동계의 대결’이라고 단언하고는 “특정계파에 의한 공당 지배는 절대 안된다”고 목청을 높인다.
동교동계를 비롯한 당의 입장에서는 ‘과학적 방법(여론조사)에 기초한 공정한 공천심사’를 강조하면서 낙천자들의 일방적인 주장만 거론하느냐고 하겠지만 공천방법론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역시 ‘내 자식뿐’▼
권노갑(權魯甲)민주당고문 김옥두(金玉斗)당사무총장 남궁진(南宮鎭)대통령정무수석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가신(家臣)그룹. 이들은 대선 직전인 97년 9월 “집권시 어떤 임명직 자리에도 앉지 않겠다”고 이른바 백의종군선언을 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청와대와 당에서 당당한 실세로 행세하고 있다.
당 총재이기도 한 김대통령으로서는 집권해 일을 하다보니 역시 자신의 뜻을 정확히 읽고 집행할 사람은 ‘내 자식’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군신(君臣)과도 같은 관계에서 격의 없는 하의상달(下意上達)이나 직언 충언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당원이나 국민의 뜻이 ‘하나의 이너서클’을 거치면서 왜곡되거나 편향된 시각에서 전달되지 안을까 하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인재들이 당과 정부에 많고 여론수렴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지겠으나 그래도 현재의 인력배치 시스템에 별 문제가 없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새 정치를 바라는 시대적 요구와 함께 모든 것을 ‘바꿔 바꿔 다 바꿔’하는 요즘 동교동이니 상도동이니 하는 말이 정치판에서 버젓이 쓰이는 게 우스운 일 아닌가.
어경택<논설실장>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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