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케이블TV의 '비극'

  • 입력 2000년 3월 10일 19시 21분


케이블TV를 시청하고 있자면 은근히 화가 치민다. 한달에 2만원이 넘는 돈(캐치원 포함)을 꼬박꼬박 징수해 가면서도 전혀 제 값을 하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케이블TV라는 유망한 뉴미디어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분노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95년 다채널 다매체 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기세 당당하게 출범한 케이블TV가 어쩌다가 지금과 같이 딱한 지경에 이르렀을까.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기반 시설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도 사실상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점이다.

▷케이블TV가 놓여 있는 처지는 ‘악순환’이라는 말로 잘 설명할 수 있다. 우리 케이블TV 방송국들은 출범 초기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신규프로 제작을 중단하고 재방송으로 일관했다. 볼만한 프로들이 사라져 갔다. 채널끼리 합종연횡하는 과정에서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한 채널들이 문을 닫았다. 채널 장르의 수가 줄어들면서 케이블TV의 생명인 전문성 다양성이 약화됐다. 실망한 시청자들이 속속 이탈하고 방송국들은 갈수록 더 몸을 움츠리는 양상이다.

▷케이블TV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상궤도에서 크게 벗어난 방송 내용이 그것이다. 첫번째 예가 프로그램 내의 노골적인 간접광고다. 지상파TV에서는 용인되지 않는 특정 업체나 업소를 ‘광고’하는 내용이 체면 가리지 않고 버젓이 나온다. 한편에서는 포르노나 다름없는 외국의 저질영화들이 심야시간대를 장식하고 폭력적인 내용의 뮤직비디오들도 넘쳐흐른다. 여러 면에서 여건이 나쁜 탓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식으로는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질 뿐이다.

▷케이블TV의 실패 사례를 보면 아무리 뛰어난 문명의 이기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의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더 큰 걱정이 있다. 20여 개에 불과한 케이블TV 채널조차 제대로 운영할 역량이 우리에게 없다면 채널 수가 훨씬 더 많은 위성방송은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세계화시대에 외국 거대방송과의 다채널 경쟁은 또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13일 출범하는 새 방송위원회의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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