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경택 칼럼]김병익, 장원, 홍사종…

  • 입력 2000년 3월 10일 19시 21분


최근 일본에서는 몇몇 정치인들의 ‘아름다운 퇴장’이 화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화제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은 중의원 8선 의원인 사민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76)전총리. “선거를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은퇴가 웬 말이냐”고 사민당수를 비롯한 동료들이 만류했으나 끝내 뜻을 꺾지 않은 노정치인의 은퇴 이유는 솔직하고 단순하다. “기력도 체력도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는 은퇴를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비례대표로 의원배지를 다시 달 수 있는 인물이다.

76세면 할 만큼 했는데 뭐가 ‘아름다운 퇴장’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 정계에는 80대 의원도 적지 않고 90세가 넘은 의원도 있다. ‘아름답다’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4년전 선거 때 ‘다음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유권자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는 점이다.

이런 일본 정계의 움직임은 주일 한국특파원들을 통해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특파원들이 이런 기사를 열심히 송고하는 이면에는 “한국 정치인, 특히 구차하게라도 정치생명을 연장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낡은 정객들은 좀 읽어보시오”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을 듯 싶다. 우리의 경우, 시민단체들이 때묻고 썩어 디지털 시대에는 아무 쓸모없는 정치인들을 향해 “이젠 제발 정치판에서 나가주시오”라고 애타게 부르짖지만 그들은 “나는 아니지. 내가 왜 나가?”라며 딴전을 부린다. 오히려 이른바 음모론 지역감정유발책임론 색깔론 등을 동원하며 반격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자조(自嘲)할 것까지는 없다. 비록 우리 정치판은 그렇지만 문화쪽에 눈을 돌리면 얘기는 다르다. 신문의 정치면은 매일 그 얼굴에 그 얼굴들의 물고 헐뜯는 얘기들이지만 문화면에서는 ‘진짜 아름다운 퇴장’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김병익, 장원, 홍사종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나이가 많아서 떼밀리듯 퇴장하는 게 아니다. 한창 잘 나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를 뒷사람에게 선선히 물려준 사람들이다.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대표 김병익씨(62). 문학담당기자 출신인 김씨는 요즘 그의 ‘아름다운 퇴장’을 취재하러 찾아오는 후배 기자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다. 그는 문학동인들과 함께 30년 동안 가꿔온 문학과 지성사 대표 자리를 다음 주에 내놓는다. 문학동인 1세대에서 2세대로 출판사 경영권이 자연스레 이양되는 것은 문학 출판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의 퇴임은 특별히 뉴스가 되는 것 같다. 그는 오래전부터 다음 세대에 물려줄 생각으로, 94년 ‘문지’를 주식회사 형태로 바꿔 준비작업을 하고 임기 3년의 대표를 약속대로 두 번으로 끝냈다. 이 승계 작업을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준비해왔다는 김씨가 밝히는 퇴임의 변은 담백하다. “나처럼 자동차 운전도 못하는 사람은 새천년 디지털시대에는 당연히 물러서야 합니다.”

4대 시민단체의 하나인 녹색연합 사무총장 장원씨(43·총선시민연대 대변인·대전대환경공학과 교수). 자신이 창립해 10년 동안 맡아온 녹색연합의 사무총장직을 그만두고 이달부터는 평간사로 백의종군한다. 창립 때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동안 기반을 충분히 닦아놨으니까 이제부터 사무총장 일을 정말 잘 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제 유명 시민단체의 사무총장이란 자리는 대단한 권력이라면 권력이겠지요. 사실 더 하고 싶은 욕심도 납니다. 그러나 미련의 끈을 끊어야지요.”

정동극장장으로 있으면서 ‘공연기획과 마케팅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은 홍사종씨(45)는 제작비조차 건지기 어려운 순수 예술계에서 보기 드물게 공연수입의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문화계에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 인물로 유명해졌다. 홍씨는 한창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정동극장장의 임기를 10개월 앞두고 사직, 새 길을 열고 있다. 숙명여대 교수가 된 그는 앞으로 미개척분야인 문화벤처부문에 몰두할 계획이다. 눈앞의 인기와 편한 길보다는 도전적인 새 출발을 택한 홍씨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선하고 아름답다.

떠날 때를 안다는 것,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데 우리 정치판에서는 언제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논설실장> euh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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