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할렘가 방문▼
재즈를 사랑했던 카뮈는 로코라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기 위해 할렘으로 갔다. 그가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된 흑인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흑인들이 미국을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정복했다고 썼다. 1938년부터 1947년 사이에 뉴욕은 세계 문화의 수도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 뒤에는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우선 뉴욕은 대공황 이전인 1920년대처럼 미국 전체에 대한 경제적 우위를 되찾지 못했다. 또한 흑인들과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대거 뉴욕으로 몰려듦에 따라, 100만 명 이상의 백인들이 점점 확대돼 가고 있는 근교지역으로 이주해버렸다. 사상 처음으로 뉴욕으로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거점 부상▼
뉴욕이 세계의 문화수도가 된 것은 파리가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 6월 14일의 파리 함락은 20세기 예술 실험실의 폐쇄를 의미했다. 수백 명의 예술가들이 히틀러를 피해 뉴욕으로 도망쳤다. 러시아 출신의 현대 발레 무용가인 조지 발란신은 유럽의 우아함과 미국의 리듬을 융합시켰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피가 섞인 발레리나 마리아 탈치프는 1946년에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뉴욕 시민들 앞에서 발란신의 전위적인 발레를 추었다. 그리고 와이오밍 출신의 화가 잭슨 폴락은 추상적 표현주의라는 혁명적인 스타일을 통해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미국적 이미지를 안겨주었다.
▼논란끝 유엔본부 들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수천 명의 동성애자들이 표면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뉴욕은 그들의 본부가 되었다. 40년대의 고급스러운 도시 스타일은 부분적으로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제1세대 동성애자 예술가들의 작품이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굳이 감추려하지 않았던 이 예술가들은 제롬 로빈스, 테네시 윌리엄스, 고어 비달, 트루먼 카포티, 카슨 매컬러스 등이었다.
한편 열띤 국제적 논란 끝에 뉴욕이 유엔의 본거지로 선택되었다. 유엔의 초창기에 많은 활약을 했던 랠프 번치는 런던이 인류의 희망을 지원하기에는 너무 “우울하고 지쳐있다”고 말했다. 첫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46년 3월에 헌터 대학의 브롱크스 캠퍼스 체육관에서 열렸다. 회의장에서는 수십 명의 외국 고위인사들과 800명의 기자들, 그리고 이상에 불타는 미국 젊은이들이 북적거렸다.
(http://www.nytimes.com/specials/nyc100/nyc100-5-dougla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