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다더니, 오랜 전통과 막강한 관록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대 레이스가 이 싱그러운 봄날에 문득 길어낸 폭발적인 생명력이 참으로 눈부시다.
직업선수들과 마스터스 부문 참가자들로 이뤄진 8600명에 가까운 엄청난 인파, 남녀노소 저마다 각기 다른 삶을 사는 그들이 달리기 하나만을 목적으로 모여들어 일제히 수도 서울 심장부의 단단한 지축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모습 자체가 이미 우리들 일상의 무력함과 누추함을 일시에 깨버리는 대단한 장관이었다. 그런데다 홀연히 뛰어난 역량과 가능성을 지닌 신선한 새 얼굴이 힘차게 그 노도의 앞머리에 나타나 세상의 눈들을 모두 크게 치켜뜨도록 한 상쾌한 충격까지 선사한 것이 아닌가. 우승자인 스물두살의 대학생 정남균선수, 참가번호 38번인 그 준수하고 유능한 젊은이는 흡사 대웅전 안의 부처님처럼 자신의 존재와 힘으로 이 큰 대회 전체를 영화롭게 만들었다.
그간 서울 도심의 대로(大路)들은 일년에 단 하루만 개방한다 해도 경제에 막심한 해를 끼친다는 경제우선논리와 효율 행정의 구호를 족쇄삼아 사람들의 접근이 차단됐었다. 그러나 우리 개인들의 삶에서 경사로운 날에 벌이는 잔치가 지닌 의의와 비용과 보람을 생각해보자. 그 얼마나 공허한 논리인가. 아무튼 서울의 도심이 그 단단한 무장을 풀고 시민들과 흔쾌하게 어울린 큰 잔치의 첫날, 이토록 복된 경사가 일어나 더욱 상서롭다.
오! 동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역사 깊은 대도시며 우리 민족의 사연 많은 어머니인 거대한 도읍 서울이여. 그대의 품안에서 이렇듯 풍요하고 호사롭고 즐거운 잔치가 베풀어진 것이 과연 얼마 만인가.
오늘의 기쁨이 하도 복되어 우리 민족의 애환을 지켜온 광화문네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한 상상 또한 흐뭇하다. 앞으로도 연년세세, 동아서울국제마라톤 코스의 출발점인 이곳에서 출발할 수많은 마라토너들이 서울의 풍광과 사람들과 역사 안으로 들어가 모두 한데 어울려 마라톤 그 찬란한 고행의 4만2195m를 행복하게 달릴 것이 아닌가.
저기 보신각이 팔을 벌린다. 동대문이 웃는다. 양재역이 손짓한다…. 대장간 풀무처럼 힘찬 호흡, 날쌔게 움직이는 단단한 다리와 다리, 인간이 지닌 신체와 체력의 한계를 향해 질주하는 그 강인한 정신과 의지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직업선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문자 그대로 달리기를 위한 달리기를 즐기는, 그래서 마라톤 경기 본연의 정신을 보다 생생하게 체현해내는 존재들인 마스터스 부문 참가자들의 달리기는 청결하기조차 하다. 더구나 백혈병 어린이와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마라톤 코스 4만2195m를 걸고 ‘1미터에 1원’의 성금을 내줄 후원자의 성원을 훈장처럼 안고 달리는 이들, 그들이 뛰는 발걸음에 맺힌 선의들은 투명한 햇살처럼 찬연하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잔치마당인가.
이번 동아서울국제마라톤 경기를 지켜보노라니, “위대한 인물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으로 그 시대를 드러낸다”는 경구가 문득 떠올랐다. 인류가 찾아낸 것 중에서 가장 숭고한 스포츠인 마라톤, 이 위대한 스포츠야말로 그 경기를 치르는 행위가 곧 인류가 지닌 역량과 권능과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살아있는 지표 아니던가.
이제 우리 앞에 새로운 사명이 놓여 있다. 마라톤을 향해 가슴을 연 우리의 수도 서울을 저명한 국제마라톤대회 개최지인 보스턴 런던 뉴욕 로테르담 같은 도시에 못지않은 마라톤문화를 지닌 훌륭한 도시로 가꾸는 일이다.
송우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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