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헌의 스포츠 세상]동아마라톤, 완주한 이들에 박수를

  • 입력 2000년 3월 20일 19시 32분


9999와 7777. 비밀작전의 암호명이 아니다. 9999는 엊그제 동아마라톤 마스터스 하프코스에 출전한 이봉주의 번호였고, 7777은 나의 번호였다. 번호 얘기부터 꺼낸 것은 나의 달리기가 그 번호와 꽤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봉주야 당연히 무심했겠지만.

“어, 저기 봐. ‘7’자가 네 개나 되네. 이봉주는 ‘9’자가 네 개였는데.” “아저씨, 오늘 정말 기분 좋으시겠네. 힘내세요.” 광화문 네거리를 출발해 종로 대로를 달리면서부터 내 가슴의 번호를 본 어린이 어른들이 성원을 해줬다.

실은 마라톤이 열리기 전부터 인사를 많이 받았다. 마라톤 달리기보다는 카드 게임을 좋아하는 이는 “포 카드네. 그런 번호라면 풀코스라도 달리겠네”라고 했다. 또 지방에 있는 딸은 제 어미한테 얘기를 들었는지 “아빠, 어떻게 그런 번호를 받았어. TV카메라에 찍힐지도 모르겠네”라며 전화를 했다.

‘7’이란 숫자가 행운의 숫자이건 아니건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한 경험 덕인지 7회가 ‘럭키 세븐’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아무튼 이번에는 ‘7’자 덕을 조금이나마 보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조금 걷다 뛰다 했던 연습 때와는 달리 걷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데는 번호도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목표기록인 2시간을 10분이나 넘겼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쉬지 않고 완주한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나는 함께 완주한 법의학자 황적준박사와 한참이나 두 손을 맞잡고 스스로 대견해 했다. 팬에 대한 보은의 마음으로 웃으며 달린 9999의 이봉주도 한국최고기록을 냈을 때 그런 감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상에 오른 등산가의 성취감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 하며 가슴을 내밀고 싶기도 했다.

사실 동아마라톤 출전은 나로서는 몇 해전부터 신년 다짐 메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동안 한번도 참가하지 못했다. 비록 하프마라톤이었지만 완주란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나는 여러 가지를 확인했다. 마라톤을 통해 우리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함께 일하고, 함께 웃고,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음을 나는 눈으로 직접 보았다. 거기엔 영남도 호남도 충청권도 없었다. 전력시비나 색깔론도 없었다. 오직 마라토너만이 있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5000m 1만m에 이어 마라톤에서도 우승한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달리기를 원한다면 1마일을 달려라. 그러나 또 다른 인생을 경험하고 싶다면 마라톤을 해 보라.”

완주한 마라토너들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이봉주의 건투를 빈다.

윤득헌 <논설위원·이학박사> dh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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