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백색 민초들의 생김생김을 짜깁기한 듯 천태만상의 외양을 하고서 마을 어귀에 떡 하니 버티고 섰던 장승. 그 꼿꼿한 자태로 이웃마을 역병도 막아내고 온갖 잡신 역신 다 대적하고, 그렇게 장승들은 마을을 지켜내고 사람을 지켜냈다.
그러나 이도 옛일이 된 지 오래. 이제는 그 흔적마저 사라져가는 장승들이 지난 26일 봄바다에 때아니게 모여들었다. 그것도 일흔 개의 장승들이 떼를 지어 사촌뻘인 솟대들을 함께 이끌고.
이 많은 장승들을 불러들인 봄바다가 어딘고 하니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해창갯벌.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방조제가 들어선 후 활기와 생기를 잃어버린 죽어가는 갯벌이다.
지난 1월 30일 새만금갯벌을 후손대대로 물려주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바닷가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제'를 열기도 했던 이곳. 매향(梅香)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장승과 솟대에 SOS 신호를 보낸 이들은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 '전북환경연합' '환경연합' '녹색연합'의 환경지킴이들이다.
25일 밤늦게 도착한 해창갯벌은 캄캄한 가운데 백열전구 하나 밝혀놓고 장승을 깎고 세우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각 지역 환경단체에서 보내 온 장승들, 이미 완성돼 우람하고 정겨운 모습을 갖춘 장승들이 갯벌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일주일째 장승작업을 해왔다는 최병수외 3명의 장승작가들은 밤깊은 줄도 모르고 장승깎이에 여념이 없다. 깎인 장승을 다듬고 글씨를 새기는 것은 참가단체 회원들의 몫.
그렇게 하나 둘 장승이 완성되면 녹색연합 청소년모임 '아이지엘' 소속 고등학생들과 동네 청년들이 '으샤 으샤' 장승을 끌고 갯벌에 가 세운다. 역시나 늦게 도착한 환경연합 초등부모임 '푸름이' 어린이들은 마냥 신기한 듯 세워진 장승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본다. 별빛 찬란한 갯벌의 밤은 깊어만 간다.
26일 아침. 잿빛 갯벌위에 60여개의 장승들이 줄지어 늘어서있다. 햇빛 아래 드러난 장승들의 이름을 살펴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피조개대장군, 죽합대장군, 망둥장군, 꽃게장군, 농게대장군….
그런가하면 전국 곳곳에서 온 지원군들의 이름도 눈에 띤다. 과천갯벌여장군, 안산시화대장군, 평택호대장군, 강동송파철새대장군, 시흥오이도여장군….
그리고 잠시 후. 장승들 사이사이 세워지는 솟대 끝엔 꽃게와 망둥이가 걸려있다. 그야말로 갯벌을 터 삼아 살아가던 온갖 생명체가 총출동한 셈.
사람들이 모여들고, 장승마다에 머리띠가 묶여지고, 장승과 장승사이를 갯벌보전의 염원을 담아 적은 수건띠가 엮어주고. 그렇게 70여개의 장승들과 솟대들은 제례를 위한 막바지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장승제에 앞서 참가자들은 해창갯벌 맞은편의 해창석산을 찾았다. 석산 앞에 세워진 석산지킴이대장군과 석산지킴이여장군이 내려보는 가운데 산신제를 지내려는 것. 방조제 공사 때문에 90% 이상이 깎여나간 돌산의 산신께 드리는 사죄의 제였다.
제를 마치고 둘러본 해창석산은 참혹 그 자체. 해발 300M의 제법 우람한 산이었다는 석산은 깎이고 남은 돌멩이들이 거의 평지를 이루는 추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양장일 환경연합 환경조사국장은 새만금 간척공사로 인해 파괴되고 있는 산이 세 개나 된다고 귀띔해준다. 예전엔 분명 소나무가 울창하고 새들이 날아드는 그런 산이었으련만…. 간척공사로 인해 잃는 것이 갯벌만은 아니었다.
다시 돌아온 갯벌. 마지막으로 노여움 가득한 얼굴을 한 갯벌여장군과 새만금대장군이 위용을 드러내며 세워지고 풍물패의 풍물이 흥을 돋운다.
'푸름이' 어린이들은 '새만금을 절대로 죽이면 안돼요!' '20년 후 이곳을 다시 찾아와도 새만금이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바람을 적어넣은 쪽지를 항아리에 담아 솟대 사이를 휘돈다. 옛부터 조상들이 소망을 담아 세웠던 솟대들에게 우리 소원 꼭 들어주라며.
이윽고 장승제가 올려진다.
"…바다 살고 산도 살고 새도 살고 사람 사는 얼쑤 좋다 환경세상 지화자자 좋을시구 생거부안 좋은 세상 활짝 열어 주옵소서 상향"
이어 질펀한 풍물극 한판. "땅도 땅도 내땅이다. 갯벌땅도 내땅이다" 구성진 가락이 풍물과 어우러져 흥겨운 춤판이 벌어진다.
장승에 질세라 바다의 터줏대감 용왕님도 납신다. 전위예술가 무세중(64)씨가 펼치는 용왕굿. 장승의 사자가 용신의 힘을 빌어 '개발역신'을 몰아내는 내용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풀꽃상 시상. 모든 갯벌 생명체를 대신하여 조개 중의 조개라 불리는 백합에게 본상이 돌아가고 새만금간척사업을 반대하는 소송을 낸 '미래세대소송단'에게 부상이 안겨졌다.
그러나 풀꽃상을 받은 백합조개를 새만금갯벌에서 언제까지나 볼 수 있을지….
새만금사업의 필요성이나 이해득실을 떠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 갯벌은 그 풍부한 유기물로 미생물을 먹이고 조개와 게, 물고기를 먹이고 새를 먹이고 결국 사람을 먹이는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다. 육지와 바다가 자연의 섭리로 만나 타협을 이루는 곳, 그 생명의 신비한 보고를 장승들이 지켜줄 수 있을까….
[부안=김경희 동아닷컴 기자]kik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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