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론은 현정부가 갑자기 들고 나온 게 아니다. 재벌체제 완성기였던 박정희(朴正熙)시대에도 있었고 그 후 역대로 재벌수술을 입에 올리지 않은 정권이 없었다. 하지만 권력과 재벌은 ‘막전 갈등, 막후 밀월’의 지혜를 유감없이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뭔가 달라질 듯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이 지난 2년간의 김대중(金大中)정부다. 변화의 원동력은 IMF태풍이었지만 아무튼 적잖은 재벌들이 ‘말석의 주인’도 영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손녀에의 선물’도 물거품이 됐다.
▷그런 가운데 터져나온 것이 현대그룹 후계대란이다. 2세간의 승부극은 족히 화제가 될만하다. 그러나 만인의 궁극적 관심사는 그게 아니다. 확인해야 할 핵심은 2년간 추진했다는 재벌체제 개혁의 현주소다. 모든 재벌이 ‘현대’의 복사판은 아니지만 적어도 현대는 달라지지 않았다. IMF태풍도 바꿔놓지 못한 현대 지배구조의 실체가 현대왕국이니 왕회장이니 왕자의 난이니 하는 말 속에 압축돼 있다.
▷정부는 올들어서도 심심찮게 재벌개혁의 ‘말 대포’를 쏘았지만 왠지 과녁을 비켜가는 감이 있었다. 어느 대기업 전문경영인은 “아무려면, 총선이 코앞인데…”라고 말했다. 선거 때 기업들이 정치권 뒷돈 때문에 시달리는 현실이 안바뀌는데 정부인들 눈치가 없겠느냐는 소리였다. 그 와중에 현대가 엉뚱한 계기를 만들자 정부여당이 다시 강공에 나서는 모습이다. 정부는 그럴 만하다. 그런데 정치권에 대해서는 어느 시민이 호칭도 없이 이런 의견을 본보에 보내왔다. “김대중 김종필(金鍾泌) 이회창(李會昌)의 정당운영 전횡도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재벌개혁도 과제지만 정당보스의 전횡 개혁이 더 급선무다.” 왕회장과 왕총재는 막상막하?
<배인준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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