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0돌 특집]겨레와 苦樂 함께한 양심의 역사

  • 입력 2000년 3월 31일 20시 52분


‘조선인은 조선의 역사상 최초의 시험으로 조선 민중을 위하여 조선 민중이 경영하는 자국어 일간신문을 간행하게 되었는데, 그 명칭은 동아일보라 한다.’

1920년 4월1일 일본의 영자지 ‘저팬 애드버타이저’가 전한 동아일보의 창간 소식이다. 그로부터 80년, 동아일보가 걸어온 길이 한권의 책으로 묶였다. ‘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 1920∼2000’(동아일보사 간).

이 책은 한 ‘장수 기업’의 팔순잔치용 사사(社史)가 아니다. 지난 80년간 동아일보가 처했던 각 시대의 사회적 지형을 역동적으로 그려냄으로써 한국 언론의 역사, 넓게는 한국 근현대사를 동아일보라는 창을 통해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실록이다. 옛 신문과 증언들을 현대어로 고치고 역동적인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풀어쓴 것도 한글세대 일반 독자 누구나가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 디지털 세대를 위해서 책 전문을 동아닷컴(www.donga.com)에도 올렸다.

동아일보 80년 역사에서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삭제’ ‘배포금지’ ‘정간’ ‘기자구속’ ‘기자 피습’ ‘신문사 습격’…. 이는 일제의 조선총독부부터 5공화국까지 나라의 독립과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섰던 동아일보의 숙명이기도 했다.

‘펜대 조심하라. 너의 생명을 노린다.’(66년 박정희 대통령의 ‘독단’을 비판했다가 테러당한 최영철기자가 받은 협박장) “당신, 이 자리에서 나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소.”(86년 보도에 불만을 품은 안기부장이 김병관 당시 부사장에게 한 말) 정권이 바뀌어도 위협의 내용은 비슷했듯이 사시(社是)인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의 이상을 현실화하려는 동아의 투혼도 면면히 이어졌다.

“동아일보에 모인 사람들은 애국심에 불타고 있었다. 남은 감옥에 가서 고생도 하는데 이렇게 편안히 앉아 문필보국(文筆保國)을 한다는 심정이었던 것이다.”(창간 기자 김동성의 회고)

신문사 마크가 새겨진 인력거를 타고 다니며 취재하던 시절부터 노트북으로 송고하는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치열한 취재과정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논설반들 싸움이 굉장했다. 의자를 들고 ‘그런 것도 사설이라고 쓰느냐’ 소리소리 지르며 전쟁판이었다.”(20년) “장관들의 회견시간이 길어졌을 때에는 마감시간에 대느라 세종로 거리에서 기자들의 달리기 경주가 벌어지곤 했다.”(48년) ….

정적(政敵) 김구와 이승만이 경복궁 꽃구경을 나왔다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며 사진을 조작했던 사건(48년), 60년 1월 서울역 귀성인파 압사사건을 일간신문 중 유일하게 보도하지 못했던 ‘대 낙종(落種)’ 등 감추고 싶은 이야기들도 솔직하게 드러냈다.

침묵으로써 진실 보도를 대신해야 했던 참담한 시절에 대한 고백도 있다. 80년 5월 광주항쟁 와중의 사설에서 ‘데모하는 시민은 우리 국민이지 적이 아니므로 군인이 국민에게 총을 쏘아서는 안된다’(남시욱 논설위원)는 대목이 검열관의 붉은 펜 아래 무참히 잘려나가자 동아일보는 닷새 동안 사설을 싣지 않았다.

동아 80년사는 신문이 억압과 통제에 굴하지 않고 펜 끝에 민심을 담으려는 치열한 노력을 했을 때 역사변화의 견인차가 될 수 있으며 ‘국민의 신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한 서울대생의 의문사에 대한 추적으로부터 시작해 끝내 6·29 선언을 불러낸 87년의 보도. 74∼75년 정부의 광고탄압 때 6개월간 주머니를 털어 빈 광고지면을 메워준 시민들의 목소리는 동아일보가 영원히 다 갚지 못할 독자들에 대한 정신적 부채다.

‘…동아는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으며/동아가 동아 이상의 것임을 알고 있노라/동아의 취재자는 우리 자신이며/동아의 편집자는 우리 자신이며/동아의 텅 빈 광고야말로 우리 자신의 아우성임을 알고 있노라….’(75년 1월 시인 고은의 ‘동아에 부치는 노래’ 중)

양장본 689쪽(화보 88면 포함). 9500원. 서점 외에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사 광화문구사옥 내 일민문화재단에서 판매. 전화주문도 가능하며 우송료는 동아일보사 부담. 02-721-7779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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