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80돌 특집/벤처21]대기업의 벤처 따라잡기

  • 입력 2000년 3월 31일 21시 31분


"문형진님은 휴가 언제 쓰실 겁니까.”

“4월경에 일주일 정도 제주도에 갈 생각입니다. 신동휘님이 이 기간은 피해주셔야겠는데요.”

10대들이 PC통신에서 나누는 대화가 아니다. 1월부터 제일제당의 모든 사무실에서는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위의 대화가 차장과 과장 사이에 오간 대화라는 사실을 기존 ‘대기업식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대기업이 벤처 따라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호칭파괴 직급파괴 연봉파괴 파격적 성과급 등 벤처기업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문화를 대기업도 배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우수 인력을 붙잡아야 하는 대기업의 고충도 반영돼 있다.

호칭파괴를 실시하고 있는 제일제당의 한 대리급 사원은 “하급자에게 ‘님’자를 붙이면서 상사들이 부하직원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높이게 됐다.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상대 앞에서도 의견을 좀더 적극적으로 낼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LG텔레콤은 4월부터 인사시스템을 ‘벤처형’으로 전면 재조정한다. 이 시스템 도입으로 과장이 리더로 있는 팀에 부장이 팀원으로 배치돼 부하로부터 인사고과를 받을 수도 있다. 대리 과장 부장 등의 직급은 근무 연한에 따라 승진이 이뤄진다. 하지만 어시스턴트(사원급월급) 주니어(대리급) 시니어(차장, 부장급) 리더(팀장급) 같은 직책과 연봉은 맡은 일과 능력에 따라 조정한다.

LG텔레콤 인사팀 최훈 과장은 “어떤 일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이뤄진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벤처를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몸값 높이기’에만 열중해 개인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은 경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삼성물산은 ‘능력에 따라 연봉을 결정한다’는 벤처기업형 연봉제를 올해초 일부 도입했다. 선물딜러 등 전문 능력을 갖춘 우수인력을 영입해 일반 직원과 차별화한 연봉을 주기로 한 프로계약직제가 그것. 이론적으로는 연봉 1억원 이상을 받는 신입사원이 가능한 셈이다. 현재까지 4명을 영입됐다. 삼성물산은 또 사내에 벤처발굴 전문조직 ‘골든 게이트팀’을 구성, 이 팀에서 신규사업에 투자할 때 투자금액 가운데 5%에 해당하는 자금을 직원들이 직접 투자해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내규를 만들었다.

대기업이 벤처기업의 ‘유연성’을 배우려 하는 모습은 하나의 대세로 굳어졌다. 하지만 조직의 ‘덩치’를 고려하지 않고 서둘러 따라할 때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공선표 인사조직실장은 “아직까지 대부분의 대기업이 호칭 직급 연봉에 있어서 변화의 과도기에 있다. 이런 와중에 과도한 변화는 조직 전체에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자기 업종의 특성과 규모를 고려해 기업 전체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벤처의 장점만을 흡수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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