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두 회사의 주가 등락이 극명하게 엇갈린 것은 여성 경영자 한사람 때문이었다. HP는 이날 최고경영자(CEO) 겸 사장으로 루슨트 테크놀로지의 사장 칼리 피오리나(45)를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세계적인 대기업들의 주가를 좌우한 그의 이름은 외신을 타고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졌다.
피오리나는 HP의 최고경영자가 되면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3개나 갖게 됐다. 첫째, 그는 뉴욕증권거래소의 다우존스 공업평균지수를 구성하는 30대 기업 가운데 첫 여성 최고경영자가 됐다. 둘째, 보수적인 성향의 HP가 외부에서 처음으로 스카우트한 임원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주요 컴퓨터 회사의 경영을 맡은 첫 번째 여성이다.
피오리나는 원래 ‘보통 여성’ 이라고 할 만하다.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태어난 그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한 뒤 교사의 길을 걸었다.
그의 인생이 전환점에 선 것은 전화회사 AT&T에 입사하면서부터. 그는 1996년 루슨트가 AT&T에서 분리될 때까지 회계담당 임원으로 고속승진했다.
루슨트에서 한해 200억달러(약22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 부문을 맡아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이 분야를 이끄는 동안 루슨트의 주가는 12배 올랐다.
피오리나의 성공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남편의 헌신적인 외조 때문. AT&T에서 함께 일하다 피오리나와 84년에 재혼한 남편 프랭크는 피오리나가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대학원 특별 연구과정에 입학하자 두 딸과 가사를 맡았다. 피오리나가 루슨트의 사장이던 98년 7월부터는 바쁜 부인을 돕기 위해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돌아섰다.
피오리나는 루슨트에서 HP로 옮긴 뒤 “내 생애에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성공은 헌신적인 남편 덕분”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종훈기자>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