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가 심판해야 할 일이다(?). 칼럼이나 논설에, 혹은 방송 토론에서 관성처럼 되풀이되는 말이다. 썩은 정치인을 내쫓고 구제불능의 정치를 바꾸는 것은 유권자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선거에 관한 점잖은 논의는 반드시 ‘유권자의 심판’ ‘신성한 한 표의 결단’으로 끝이 난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정답’의 되풀이가 역겹기조차 하다.
유권자 당신들! 이렇게 말하면 ‘왜 아무나 싸잡아 따지느냐’고 화내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분명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참 유권자’가 다수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이비’ 유권자, 부적격 정치인보다 더 저질의 유권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 또한 현실이다.
일전에 서울에 주재하는 외국특파원 K씨가 방송에 나와 한국 유권자들의 ‘거지 근성’을 나무라는 것을 보았다. 오늘날 한국이 어떤 나라인데, 지금도 선거철만 되면 얻어먹고 떼쓰는 것으로 일삼느냐는 탄식이었다. 세계 어디 괜찮은 나라에 그런 지저분한 유권자들이 있느냐, 그렇게 쓰는 돈이 다 어디서 나오겠느냐는 반문이었다. 그 특파원도 ‘부적격’ 딱지를 붙여야 할, 퇴출시켜야 할 유권자만 가려낸다는 것이 어려웠던지 모든 유권자들을 싸잡아 비판했다.
지역주의 문제로 나아가면 참된 유권자를 구분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일전에 방송토론에서 진행자가 ‘전라도에 막대기를 꽂아도, 충청도에 강아지를 내놓아도, 경상도에 고양이를 공천해도 지역당 후보가 당선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여기에 정당 토론자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다른 동네의 지역감정’만 쳐다볼 뿐 ‘우리 동네의 악감정’은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한국에 정당은 없고 동네 인물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지난달 동아일보의 여론조사에서도 수치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충청도에서 한나라당 지지도가 자민련보다 못하지만 한나라 후보가 앞서는 지역만 유독 당 지지도도 오른다. 경기도 전역에서 자민련의 인기가 낮지만 후보가 크게 앞서는 지역에선 자민련 지지도가 무려 4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과 부산 등지에서도 민주당의 인기가 형편없지만 후보가 나름대로 선전(善戰)하는 한두 곳은 정당지지도도 인접지역과 다르다.
90년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의 불꽃튀는 지역 대결을 한국선거연구회가 통계로 분석한 내용도 있다. 대선 때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연고지역에서, 그리고 총선 때 민자당(신한국당) 국민회의(민주당) 자민련 역시 각각 연고지역에서 적어도 37% 이상 득표했다. 그리고 많게는 89.4%를 휩쓸었다. 이 통계에는 대선에서 후보를 내지 못한 대구 경북 및 서울 인천 경기 출신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반응이 영호남에 비해 20%포인트의 차가 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당정치 반세기, 아직도 한국 정당의 실체는 모래성일 뿐이라는 증거이다. 정당 건물이나 간판은 그럴듯해도 그 이념이나 정책은 허울뿐이요, 유권자들은 기실 ‘우리동네’를 대표할 사람이 나오느냐, 그 사람이 어느 당의 옷을 입고 있느냐 하는 데만 관심을 쏟는다. 옛적의 붕당(朋黨)정치 수준이라는 증빙이 아닌가.
한국 정치인은 바로 이런 유권자가 뽑는다. 그렇기 때문에 후보의 자질이나 능력은 ‘동네 대표성’에 밀리기 마련이고, 심지어 범죄인이라도 지역정서(감정)에 부응하는 사람이라면 국회로 진출할 수 있다. 시민단체가 아무리 부적격 별표를 달고 낙선운동을 벌이며, 그 후보의 범죄 전과, 탈세, 병역기피가 온나라 ‘다른 동네’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우리 동네’사람들이 ‘썩어도 준치’라고 택하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에다 먹을 거리에 굶주리고 돈을 탐하는 유권자의 수준이 보태진다. 선거 때만 되면 전화로 후보를 초청해 음식값 씌우기, 자선 사업을 빙자한 물건강매, 그린벨트 해제요구, 소각장과 화장장 백지화 요구, 교도소 이전 요구, 터미널을 옮기지 말라는 요구 등 지역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압력들이 가세한다. 그래서 선거는 차악(次惡) 고르기도 아닌 최악의 선택으로 치닫는다. 눈에 보이는 사이비 유권자를 퇴출하고, 내 안의 보이지 않는 ‘사이비 유권자’ 즉 공고한 지역감정병 같은 것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부적격 정치인 낙선운동 보다 오히려 앞서야 한다.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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