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제목으로 걸친 책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상상력은 학문과 지식의 동력원이자 저수지다. 그러나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상상력은 그 이상이다. 밥이요 생명이다. 생존요건인 셈이다.
물론 이 책은 상상력을 키우는 노하우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상상력의 뿌리를 추적함으로써 ‘상상하는 인간’(호모 이미지쿠스)의 전체상을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상상력은 8가지 원형구조에서 싹튼다. 1.초월적 실재의 의식 2.분신·죽음·내세 3.이타성 4.통일성 5.기원의 현재화 6.미래의 해독 7.탈주 8.대립적인 것들의 투쟁이 그것이다. 상상력연구의 시조라고 해야 할 가스통 바슐라르가 공기, 불, 물, 대지라는 네가지 자연적 요소를 ‘상상력의 호르몬’으로 간주하면서 ‘공기와 꿈’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대지와 휴식의 꿈’등의 저작을 통해 상상력의 프로그램을 집약한 것에 비하면 8가지 카테고리가 다소 번잡하게 여겨진다.
번잡했던 탓일까. 저자는 상상력의 8가지 원형구조라고 지목된 것들을 설명하면서 균형을 잃었다. 2, 3, 7항에 대해서는 장(章)을 달리하면서 긴 설명을 하고 있는 반면에 1, 4, 5, 6, 8항목에 대해서는 절(節) 단위에서 매우 피상적인 언급만 하고 있을 뿐이다. 상상력이 잉태되는 원형구조를 보다 분명하게 언급할 생각이었다면 1, 2항을 합쳐 ‘초월적인 것들’로 묶고 3, 4, 8항을 합쳐 ‘관계적인 것들’로 묶으며 5, 6, 7항을 합쳐 ‘유토피아적인 것들’로 묶는 편이 저자의 본래 의도를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는 틀이 되었을 듯 싶다.
이처럼 세가지로 다시 나눈 각각의 카테고리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첫째 상상력은 공포와 대결하면서 싹튼다. 공포와 위기야말로 상상력의 으뜸가는 모태다. 특히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죽음의 공포야말로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상상력의 저수지다. 천국과 지옥, 영생과 내세를 향한 상상력은 모두 여기에 기인한다.
둘째 타자와의 관계가 상상력을 부추긴다. 유럽의 상상력은 인도와 중국이라는 타자가 있음으로써 가능했다. 마르코 폴로는 인도양을 둘러싼 세계가 자그마치 1만27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결국 그 상상속의 흩어진 섬들에 대한 몽상과 공상이 합쳐져 중세 유럽의 ‘동방적 상상력’을 형성했던 것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세째 상상력은 태초와 종말을 의식한 결과이고 그 가운데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몸부림이다. ‘성서’의 에덴동산을 꿈꾸고,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에서 엿보이는 인간과 신들이 함께 살았던 고대의 황금시대를 꿈꾸듯 ‘근원과 처음’을 향한 짝사랑이 상상력을 키운다. 아울러 ‘요한계시록’처럼 심판을 전제한 종말론적 사고 역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런 위기와 절망의 상상력은 새로운 역사로의 탈주를 꿈꾸며 유토피아적 상상력으로 변형된다.
저자는 상상력의 세계를 역사시대에 국한해서 말한다. 그리고 상상력의 영역을 서양의 경험으로 제한한다. 하지만 선사시대인들도 상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른바 ‘야만적 사고’는 상상력의 진정한 원천이다. 더구나 상상의 동양적 경험은 서양의 그것보다 결코 왜소하지 않다. 그 이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결함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과 동거하고 있다. 상상력의 원형구조를 분석하는 일이 상상하는 행위에 족쇄를 채우는 일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적 상상력 연구의 시조격인 바슐라르와 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를 논급했던 질베르 뒤랑의 관점을 충실히 잇는 저자에게 상상력은 진화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구조화된 상상력 프로그램이 시대에 따라 다른 버전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런 관점이 상상력 연구를 몽환적 공상적 수준에서 구조적 분석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점은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상상력은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기 이전에 생활과 생존의 한 부분이지 않은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선생이 학생들에게 ‘시의 이해’ 서문을 읽히고 난 후 “우리는 시의 구조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 그 자체를 이야기하려는 거야. 지금 당장 서문을 찢어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상상하는 것 그 자체이지 상상력의 원형구조를 아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이여 ‘상상력의 세계사’를 읽으라. 그러나 읽었거든 주저없이 책을 찢으라. 그리고 상상하라. 프로그램화된 원형구조가 아닌 그대의 생생한 삶 속에서… .
정진홍(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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