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방송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탤런트 황수정(28)이 맡고 있는 의녀(醫女) 예진이 바로 이러한 ‘격식 파괴’의 정점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제까지 시대극에서 여자 주인공의 유형은 대개 지아비만을 바라보는 순종적인 아낙네, 아니면 세습된 권력에 의존하는 여걸(KBS1 ‘왕과 비’의 채시라 등)이었다.
하지만 예진은 이 둘을 합친 것 이상의 여인이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은 의술을 갖춘 당당한 ‘커리어 우먼’인 동시에, 허준이라는 유부남을 흠모하는 여인인 것이다. 극 중 허준을 맘 속에 품게 된 것도 그의 외모나 남성성에 끌렸다기보다는 경남 산음에서, 그리고 한양 내의원(內醫院)에서 같은 ‘의술인’으로 존경하면서 연정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사내 연애’쯤 될 법하다. 때문에 허준이 수석으로 의과에 급제해 클라이맥스를 넘기면서 자칫 초점이 흔들렸던 ‘허준’은 곧장 예진을 드라마의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탄력으로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예진 역을 맡은 황수정은 1994년 SBS MC 공채 1기로 방송가에 발을 들인 이후 요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의 매니저는 ‘허준’ 이후 계약한 CF만도 화장품과 치약 등 5개로 출연료가 10억원에 육박한다고 귀띔했다.
―데뷔 후 6년만에 맡은 첫 시대극(사극 포함)이 사실 첫 히트작이다.
“그동안 내 이미지는 불분명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적인 마스크라 무조건 커리어우먼을 해야 한다면서도 무슨 한(恨)이 서린 듯한 이미지가 있다나. 그래서 드라마에서 변변히 한복을 입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의 이런 이중적인 이미지를 제대로 뽑아내 준 것이 ‘허준’이다.”
―가만히 보면 방송가에서 둘도 없는 맏며느리 상인데 왜 시대극을 이제서야 하게 됐나?
“전문 MC로 출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데뷔 이후 1년 넘게 항상 정장차림에 마이크 잡고 무대에 섰으니, 어느 드라마 PD가 나를 시대극에 기용하려 했겠는가.”
―‘허준’ 속의 캐릭터를 보면 주위에 온갖 넘어야할 장애물 투성이다. 또 실제 연기자들도 개인적으로는 고난을 적잖게 겪은 인물들이다. 허준 역의 전광렬은 10여년 전 연기를 못할 상황에 처하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은 탤런트 J씨와의 스캔들 등을 빼고는 별 어려움 없이 연기생활을 해왔지 않은가.
“하긴 무명 시절도 그리 길지 않았으니….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5년 넘게 내 캐릭터를 못잡아낸 시간 동안 말못할 고민도 많았다. 전공(경원대 디자인학과 졸업)을 살려 미술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지금까지 시대극에서 의녀가 다뤄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연기 반경이 더 넓을 수도 있겠다.(웃음)”
―제작진은 원래 의녀들의 삶을 통해 당시 내의원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요즘은 또 다른 궁중암투의 장으로 사용된다는 느낌이다.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여성들의 신분상승 채널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리 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기와 달리 취미가 ‘과격’하다고 들었다.
“운전을 좋아해서 3년 전 카레이서 자격증을 땄고, 대학 다닐 때는 검도도 좀 했다. 요즘 하루에 3∼4시간 자면서 촬영해 쓰러지지 않는 것은 다 그 덕이다.”
<이승헌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