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배인준/실컷 싸웠지요?

  • 입력 2000년 4월 13일 19시 42분


우선 ‘비이성적 흥분’에서 깨어날 때다. 총선 기간중 가장 극심한 집단흥분상태에 빠져 자제력을 잃고 본분을 망각한 건 역시 정치권이다. 정부도 비슷한 증후를 보였다. 일탈된 흥분의 에너지는 어디에 쓰여 무얼 남겼나.

여야 정당과 총선 후보들은 득표와 선거 승리에만 목을 걸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들은 말하겠지. 하지만 유권자 납세자 입장에선 그런 의식과 행태를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만은 없다.

구제역이 전국의 농가를 덮쳤다. 산불이 국토와 양민의 재산을 잿더미로 바꾸었다. 국가적 대재난이다. 그런데도 국회는 관련 상임위원회 한번 열지 않았다. 각 정당 지도층과 엄연히 임기중인 15대 현역의원들은 한결같이 국가긴급사태의 미온적 수습을 방관했다. 평시라도 상임위를 최소한 월 2회는 열도록 명시한 국회법은 법전에만 살아 있다. 아무리 선거철이라지만 민생을 그렇게 헌신짝처럼 내팽개칠 수 있는 일인가.

‘나를 뽑아 주시면 민족과 국가와 지역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고? ‘우리 당을 제1당으로 만들어 주셔야 나라가 산다’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나라의 재앙과 민생의 비명에는 침묵하면서….

정치권은 선거 기간중 경제를 비틀어 놓는 잘못까지 저질렀다. 각 정당은 표 계산에만 몰두해 수많은 공약들을 쏟아냈다. 정부 각 부처와 그 장관들도 질세라 북 치고 장구 쳤다. 정부여당이 약속한 예산사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머지않아 재정파탄을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잖아도 국제통화기금(IMF)은 12일 정부지출 억제를 우리나라에 촉구했다.

여야 정당은 또한 경제를 초점 없고 해법 없는 정치공방의 메뉴로 삼기에 급급했다. 민주당은 경제가 한없이 좋아질 것처럼 떠들다가 느닷없이 한나라당 때문에 위기가 닥쳤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한나라당은 정부여당이 실정(失政)을 거듭해 새로운 위기를 잉태했다고 아우성쳤다.

야당이 국가채무 재정불안 국부유출을 문제삼았다고 없던 위기가 갑자기 생기고 주가가 폭락했다고? 선거 기간중 주가를 움직인 재료는 미국 증시의 동향, 국내 증시의 수급상황, 벤처기업과 코스닥시장의 거품 붕괴론, 그리고 선거후 경기와 경제정책의 불투명한 향배 등이었다.

정부여당이 경제를 위기로 이끌고 있다면 야당은 지난 2년여 뭘 했나. 기업 금융 노사 공공부문 등의 진정한 구조개혁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여당에 힘을 보태 주었나. 지난날 경제를 망친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경제를 되살리는 일이라면 당리(黨利)를 떠나 응원을 했어야지.

총선 기간중 여야 어느 쪽도 경제 각 부문의 구조개혁과 체질강화를 채찍질하는 목소리와 ‘쓴 약 처방’은 내지 않았다. 정부 또한 개혁 드라이브를 사실상 중단했다. 정치권과 정부는 선거전 득실만 따지며 각 유권자층에 앞뒤 안맞는 립서비스하기에 바빴다.

그 와중에 집단이기적 행동이 판을 쳤지만 법제도와 시장원리에 입각한 조정력은 실종됐다. 정치권과 정부부터 자기네 집단이익 최우선의 행태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래서 민간 각 부문의 집단이해(利害)를 룰에 따라 조정할 힘과 권위를 스스로 약화시켰다. 정부여당과 야당이 함께 조장 방치한 이같은 상황이 위기라면 위기다.

선거는 끝났다. 여야는 그만하면 실컷 싸우지 않았는가. ‘묻지마 거짓말’도 할 만큼 했다. 정치권은 이제부터라도 이성을 되찾고 산적한 경제문제를 풀어나가는데 국가잠재력이 결집되도록 정부와 국민을 이끌어야 한다. 당장 국회에서 경제 각 부문의 본격적 구조개혁과 새로운 경제산업모델의 구축을 촉진하기 위한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 각종 경제활동의 병목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제정 개정해야 할 법제도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야가 끊임없는 힘겨루기와 소모적 정쟁으로 지샌다면 경제와 민생은 정말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정치권이 계속 그 모양이면 어떤 부문도 경제과제 해결과 생산적 활동에 힘을 집중시키기 어렵다. 그것이 정치의 비생산성이 낳는 이중의 해악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상 오늘로 시작되는 김대중(金大中)정부 후반기의 최대과제는 역시 경제불안 해소다. 정부여당은 선심정책의 거품부터 걷어내야 한다. 또 경제 안정화와 개혁 마무리를 위한 투명한 설계도를 내놓고 조정력을 복원해야 한다.

배인준<논설위원>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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