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 건축가로부터 들은 말이다. 듣기 좋아서 우쭐해진 나에게 그가 덧붙였다.
“하지만 마무리 손질에 이르면 일한(日韓) 편차는 여전해요. 일본인에게는 구석 타일 한 장까지 제자리에 정확하게 붙어 있지 않은 한 공사는 끝난 게 아니죠.”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짧은 기간이나마 일본 교토의 연립주택에서 머물면서 건물 공사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확인할 수 있었다. 내게는 약간의 공사 현장 실무 경험과 20년에 걸친 한국 아파트 거주 경험이 있다. 그만하면 일본 건축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17년째 사는 서울 근교 아파트에서 지금도 소음에 시달린다. 위층 아이들 발소리에 시달리고, 옆집 피아노 소리에 시달리고, 공지사항 알리는 실내 스피커 소리에 시달린다. 일본 연립주택에서는 이웃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벽이나 바닥이 워낙 두꺼워 웬만한 소리는 상하좌우로 전해지지 않는단다. 일본인은 남에 대한 배려가 곰상스러운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연립주택이 조용한 것은 아니란다. 연립주택(하드웨어)이 워낙 잘 지어진 데다 이웃에 대한 배려(소프트웨어)가 각별해서 일본 연립주택은 절간 같단다.
3월 남산 밑에 우뚝 솟은 고층 특급 호텔에서 열리는 한 회사의 창립기념 잔치에 참석하는 ‘실수’를 했다. 개막 팡파르가 울리는 데 옆에 앉아 있던 여류화가 한 분이 기절초풍하고는 모로 쓰러졌다.
참으로 폭발적인 음향이었다. 어찌나 폭발적이었던지 귀를 막아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모두 참아서 나도 참았다. 축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알아들을 수 없었고 축가로 부르는 소프라노의 고음 패시지는 귀청을 찢는 것 같아서 귀를 막아야 했다. 동석했던 노(老) 음악평론가의 입술에 냉소가 감돌았다.
소리 지옥에서 견디다 못해, 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라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현장 중계 중인 기술 스태프에게 귀띔해도 허사, 진행 스태프에게 충고해도 허사, 그 초호화 호텔 지배인에게 항의해도 허사였다. 한 손으로는 스피커쪽 귀를 막고, 한 손으로는 폭발적인 음향에 진동하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 두 시간(!)을 견뎠다. 보람이 없었다.
하마 끝날까, 하마 끝날까 기다리면서 견디는데, 전자 바이올리니스트를 필두로 악단까지 무대로 또 쳐들어오는 걸 보고는 기겁을 하고, 동석했던 선배와 함께 직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선배 함자를 밝히는 게 좋겠는데, 그는 편집 디자이너 정병규 교수다. 우리는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갔다가 따귀를 맞고 쫓겨난 기분을 서로 다독거리면서 밖에서 밥을 사먹었다. 우리는 서로 물었다.
“우리는 저들의 무례에 과격하게 반응했는가? 우리는 안정저해 사범인가?”
미국의 경우 그런 잔치에서 손님들이 연단에 주목해야 하는 시간은 30분을 넘지 않는다.
행사는 계속되지만 듣고 싶으면 듣고, 듣기 싫으면 먹으면서 옆 사람과 담소하니 행사와 식사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셈이다. 우리가 뛰쳐나오고 만 행사처럼, 연단을 제외한 조명이라는 조명은 다 꺼버리고 악다구니로 자화자찬하느라고 두 시간 이상 손님 배 곯리는 무례는 범하지 않는다.
한 문학상 시상식장 뒤풀이 자리에서 주최측이 손뼉을 치고는 좌상의 ‘한 말씀’이 있는 만큼 좌중에게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좌상은 주최측을 저지하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이 주목을 요구할 것 없어요. 나의 ‘한 말씀’이 곧 그 주목이라는 것을 획득하게 될 테니.”
잦아진 뒤에 침묵을 지어내지 못하는 소리를 우리는 소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소리 문화의 정점은 고요이겠다.
[이윤기=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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