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조훈현-조치훈 옛 명성 찾을까

  • 입력 2000년 4월 26일 20시 45분


10일 일본 도쿄의 일본기원에서 열린 제13회 후지스배 16강전. 타이틀이 걸린 빅 게임은 아니었지만 관심이 집중된 대국이 있었다.

두 대국자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활동하며 한때 세계 1인자를 다퉜던 조훈현(曺薰鉉·47) 9단과 조치훈(趙治勳·44) 9단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조훈현 9단의 승리였다. 흑을 쥔 조 9단이 141수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긴 자도, 진 자도 승패를 떠나 착잡함이 앞서는 한판이었을 것이다.

이창호 9단이 신동 에서 신산(神算) 으로 별명을 바꿔가며 세계 바둑의 1인자로 군림하기전 팬들에게는 바둑=두 조씨 를 의미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두 거장은 세월과의 싸움이 힘겨워 보인다.

"명예 기세이(棋聖)를 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봅니다. 왕리청(王立誠) 9단은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

지난달 기세이전 도전 6국에서 져 종합전적 2승4패로 5연패에 실패한 조치훈 9단의 소감이다. 5회 연속 우승한 기사에게 부여하는 '명예 기세이' 의 영예도 물거품이 됐다.

지난해 조선진 9단에게 혼인보(本因坊) 타이틀을 내주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일본 기사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 에 가까웠다. 혼인보 10연패와 기세이 메이진(名人) 혼인보 등 일본 3대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하는 이른바 '대삼관(大三冠)' 을 3년간 유지하는 괴력을 보여줬다. 비록 그가 3∼4시간의 제한시간으로 치러지는 세계 바둑대회에서는 부진하지만 제한시간 8시간의 '이틀 바둑' 에서는 단연 최강이라는 게 일본 바둑계의 변명이기도 했다.

기세이전 뒤에 있었던 혼인보에서도 도전권 획득에 실패했다. 4승1패로 선두를 달리다 내리 2패를 당해 승률이 좋은 기사에게 도전권을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주요 기전 중 그의 수중에는 메이진만 남았다.

반면 조훈현 9단은 일단 급한 불을 껐다. 지난 2월21일 애지중지하던 국수전을 한국 기원 소속의 중국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에게 내줬던 그는 42일만인 3일 패왕전 타이틀을 지켜냈다. 최근 성적도 괜찮은 편이다. 후지스배와 천원전 8강에 진출해 있고 춘란배에서는 한국기사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바둑계에는 두 조씨의 부진을 구별하는 의견도 있다.

조훈현 9단은 추락의 '가속도' 를 줄여왔다는 점이다. 내제자인 이 9단에게 1인자의 자리를 넘겨준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최근 몇 년간 1∼2개 타이틀을 유지하면서 체면유지 는 해왔다는 것이다. 일본 바둑계의 1인자로 군림해온 조치훈 9단의 몰락은 충격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8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에게 정상의 자리를 내줬을 때는 20대였으나 지금은 40대다. 나이가 들면서 정신력과 체력 모두 약해지고 있다.

조훈현 9단이 후발그룹의 추격이 약한 한국 바둑 판도에서 비교적 손쉬운 싸움을 벌이는 반면 조치훈 9단은 일본 바둑계의 두터운 '선수층'을 뚫어야 한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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