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로 위장한 쿠바 난민들을 쿠바의 피그만에 침투시켜 카스트로 공산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던 이 사건은 미 외교사에 지금도 ‘재앙’으로 남아있다. “반군의 내응이 있을 것”이라는 미국중앙정보국(CIA)의 말만 믿고 피그만에 상륙했던 1400명의 가련한 쿠바 난민들은 피델 카스트로 군대에 의해 모두 포로가 되거나 사살됐다.
존 F 케네디정부의 외교적 손실은 막대했다. 국제사회에서 망신당한 것은 물론 이 사건을 계기로 쿠바는 소련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쿠바는 결국 소련의 핵미사일을 끌어들임으로써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위기’를 촉발시켰다.
피그만 침공계획은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없었다. 카스트로정권이 난민들에 의해 무너질 만큼 허약하지도 않았고, 성패에 관계없이 누구든 CIA를 그 배후로 지목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런 무모한 결정이 나왔을까.
피그만사건은 ‘집단 사고(group think)’의 폐해를 보여준 정책결정의 전형으로, 대내외 정책을 막론하고 지금도 연구대상이다.
‘집단 사고’란 정책결정에 참여한 사람들간에 친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논쟁을 통해 좋은 결정을 도출하기보다는 쉽게 한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른바 ‘동화(同化)의 경향’인데, 결국 친한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결정을 하면 잘못된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피그만사건 당시의 정책결정 구조가 그랬다. 케네디를 비롯해 딘 러스크 국무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맥조지 번디 안보보좌관, 앨런 덜레스 CIA국장 등 결정에 참여한 7인이 모두 친구사이였다. 성장배경도 비슷했고 출신학교도 대부분이 하버드대였다.
서로 워낙 친했던 이들은 침공계획의 무모함을 집어내지 못했다. 전략회의가 수차례 열렸지만 누구도 반대편에 서서 한번쯤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당대의 지성인들이기도 했던 이들이고 보면 실로 불가사의한 실수였다. 뒷날 케네디는 “내가 그토록 어리석었단 말인가” 라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피그만사건의 교훈은 자명하다.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려면 적어도 ‘집단 사고’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목전에 와있다. 정부 여당은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회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내려야 할 크고 작은 결정들 앞에서 언제나 ‘피그만의 교훈’을 되새겨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나친 걱정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정상회담 개최합의 발표 때 여권은 이미 한차례 비슷한 ‘실수’를 했기에 하는 말이다.
정상회담 발표가 회담에 대한 일각의 냉소적인 반응을 낳았고, 총선에도 오히려 역작용(영남표의 결집)을 초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고 보면 발표 시점과 방식을 놓고 여권 핵심부에선 좀더 다양한 논의가 있었어야 했다.
‘집단 사고’의 폐해는 특정 집단이나 보스에 대한 충성심과 도덕성을 혼동한다는 데 있는데 여권의 실세그룹이 다시 이런 함정에 빠지지 말란 법이 없지 않는가.
이재호<정치부부장대우>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