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럭 한올 한올 살아있는듯"
화가는 바늘처럼 가늘고 빳빳한 붓으로 터럭 한 올 한 올을 무려 수천 번 반복해서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런 극사실 묘법을 썼는데도 전체적으로 범의 육중한 양감(量感)이 느껴지고, 동시에 고양이과 동물 특유의 민첩유연한 생태까지 실감나게 표현된 점이 경이롭다. 화면은 상하 좌우가 호랑이로 가득하다. 이렇게 꽉 들어찬 구도 덕에 범의 ‘산어른’다운 위세가 잘 살아났다. 긴 몸에 짧은 다리, 소담스럽게 큼직한 발과 당차 보이는 작은 귀, 넓고 선명한 아름다운 줄무늬와 천하를 휘두를 듯 기개 넘치는 꼬리, 세계에서 가장 크고 씩씩하다는 조선범이다.
여백 또한 정교하게 분할되어 범을 돋보이게 한다. 호랑이 다리 근처 우로부터 하나(1) 둘(2) 셋(3) 점차로 커 가는 여백의 구조는, 위쪽 소나무 가지의 여백에서도 하나(4) 둘(5) 셋(6) 같은 방식으로 펼쳐졌는데, 꼬리로 나뉜 작은 두 여백(7, 8)과 더불어 완벽한 조응(照應)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복판에 몸통을 뒷받침하는 넉넉한 여백(9)이 있다. 소나무 둥치를 보니 한가운데 이상한 것이 있다. 주위가 하얗게 벗겨졌고 이파리도 없으니 이것은 나뭇가지가 아니다. 바로 범이 자기 영역을 표시하려고 깊고 길게 발톱으로 훑어냈던 상처 자국이다.
▼"단군신화 이래 겨레의 영원한 상징"
호랑이는 단군 신화 이래 겨레의 상징이다. 야담에서도 단골 손님이었지만, 특히 박지원의 ‘호질(虎叱)’ 에서는 썩어빠진 선비를 꾸짖고 호통을 쳤던 주인공이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호랑이로 상징되는 조선 혼의 부활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대대적인 박멸 작전을 펼쳤으니, 그 결과 호랑이 종주국인 한국에 야생 호랑이가 한 마리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범은 영물이다.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눈에 쉽사리 뜨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야담 속 호랑이는 보은(報恩)의 존재고 그 자신 산신령이다. 옛 글에 “산이 높아 훌륭한 게 아니라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라고 했는데 나는 “호랑이가 깃들여야 신령한 산”이라 고쳐 말하고 싶다. 생태계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는 호랑이는 그 자체가 산의 건강함, 신령스러움이기 때문이다.(중앙대 겸임교수)
josoh@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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