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제동 걸린 편법상속

  • 입력 2000년 5월 10일 18시 22분


삼성그룹 이건희(李健熙)회장 일가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통한 증여 상속에 대한 법원의 제동은 적지 않은 파급효과를 낳을 전망이다. 9일 서울고법이 1심을 뒤집고 내린 가처분 결정의 요지는 ‘삼성SDS가 BW를 주총 특별결의 없이 현저히 싼 가격으로 발행해 이회장의 장남 재용(在鎔)씨 등 지배주주 특수관계인에게만 넘긴 것은 부당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결정은 우선 참여연대가 따로 낸 ‘BW 발행 무효’ 본안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가처분 결정으로는 이례적으로 본안판결의 쟁점이 될 수 있는 정관 및 이사회 결정에 대해 ‘상법에 반하므로 무효이며 절차상 중대한 위법이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법원이 본안소송에서도 참여연대측의 손을 들어줄 경우 재벌들의 상속 및 경영권 승계 관행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변화가 불합리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소액주주들의 불이익을 예방하는 등의 효과까지 낳는다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서울고법 민사12부(재판장 오세빈·吳世彬부장판사)의 이번 결정이 담고 있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재벌들은 그 뜻을 겸허하게 읽고 자신들의 상속 및 오너십 승계 관행에 내재한 문제점을 스스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소액주주운동을 견인하면서 부(富)의 투명한 이전 풍토를 만들기 위해 애써온 참여연대의 활동도 평가받을 만하다. 이해(利害)를 달리하는 쪽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미워할지 모르지만 이같은 시민단체의 힘이 경제사회적 불합리를 줄여야 한다는 다수 국민의 공감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편법상속의 문제는 시민운동가들의 사후적 쟁점화와 특정 소송에 대한 법원의 판단에만 맡겨질 사안이 아니다. 그보다는 헌법에 합치하는 범위 안에서 관련법들의 미비점을 철저하게 보완하고 관계기관들이 이들 법을 엄격하게 적용해 편법행위의 진행을 예방 차단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참여연대의 신주인수권 행사 금지 가처분신청에 대해 삼성측은 그동안 “BW 발행은 세법상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며 재산변칙상속 의혹을 일축해왔다. 하급심이긴 하지만 서울지법 민사합의 50부도 지난 2월 “절차상 문제가 없다”며 참여연대측 신청을 기각했다.

이는 관계법에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허점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해 정부 관계자도 ‘법은 기고 재벌은 난다’고 실토한 바 있다.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행위에 대한 정서적 대응보다는 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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