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나종일/사제관계 일방통행식 벗어나야

  • 입력 2000년 5월 14일 20시 07분


후세의 위작(僞作)이겠지만 동방 원정 중 알렉산더가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본 일이 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성공을 축하한 후에 그가 오늘날의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은 자신의 교육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지적하고 '이제 늙어 형편이 어려운 처지이니 부양을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알렉산더의 답장은 매우 냉소적이다.

만약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소규모 도시국가를 이상으로 하던 가르침을 따랐더라면 오늘날의 업적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은 오히려 오늘날의 알렉산더가 되는 데 장애가 됐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적어도 예전에 낸 수업료를 반환하라고 요구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부양을 요구하다니….

매년 스승의 날에 어떤 형태로건 제자들의 사은 표시를 받을 때에는 심경이 단순할 수만은 없다. 과연 나는 이 사람들에게 어떤 혜택을 베푼 것인가.

솔직한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사제 관계란 시혜의 일방통행로 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 속담에 '어린아이 3세면 부모의 은혜를 모두 갚는다'는 말이 있다.

아이를 길러본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에서 아이만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부모 역시 정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많이 성장하는 법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여서 지식이건 지혜이건 간에 사제가 함께 성장하는 관계이지 어느 한편이 완성된 상태에서 다른 한편으로 일방적인 공급이 이뤄지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참되거라' '바르거라' 하고 이르는 것은 스승만이 아니다. 좋은 사제지간에는 제자도 스승에게 같은 경계를 보낸다.

예를 들어 가장 소극적인 경우를 생각하더라도 스승이 명시적이건 묵시적이건 간에 이런 의사를 표시하는 것 자체가 쌍방간에 모두 도움이 되고 경고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승의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올바르게 되라고 하거나 스스로 모범이 되려는 생각 자체가 본인에게도 좋은 각성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승의 은혜'만을 노래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유감스럽지만 스승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불행을 겪은 제자들의 사례도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기적인 나쁜 동기에서든, 아니면 순수하고 좋은 동기에서든 간에 스승의 잘못으로 피해를 보는 경우는 부르제의 고전적인 소설 외에도 현실에서 가끔 경험할 수 있다.

냉전 시기에 필자가 유학한 학교의 졸업생 몇 명이 구소련의 첩자가 되어 조국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 것은 물론 본인 자신과 주변에 모두 불행을 가져온 일이 있었다. 그 근본 원인이 교수에게 있었다고 들었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는 아닐지라도 필자는 옛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혹시나 내가 이들의 지적인 성장이나 도의적인 성숙 또는 심지어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장애를 만드는 일이 없었는지를 생각해보곤 한다.

우리나라는 사제의 사이가 각별해 일생을 두고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의 외국인 동료들은 이 점을 매우 부러워한다. 스승의 은혜를 특별히 생각하는 스승의 날 행사는 이렇게 보아 우리 문화와 습관의 일부이며 좋은 의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습관이 더 전향적인 사고와 방향을 가로막으면 곤란한 일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의식을 행한 일이 있다. 또 소크라테스의 대화록 중에 인상 깊은 것은 사제지간의 관계가 일방적인 교습이 아닌 발랄한 대화로 이어지는 점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일방적인 은혜나 일방적인 가르침과 배움의 일방통행으로 그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미세한 필요에도 배려하는 마음가짐으로 정리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종일<경희대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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