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사랑받는 시인 김광규의 81년작 ‘반달곰에게’의 일부다. 81년5월, 경기 광주군 인근에 10여 차례 출몰한 세살배기 반달곰 한 마리가 끝내 경찰에 사살된,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를 사건이 있었다.
광주항쟁 1년 뒤의 엄혹하던 시절 마땅한 정치적 어젠더를 만들어낼 수 없던 불모(不毛)의 언론은 때아닌 ‘반달곰 추적작전’을 연일 중계했고 국민도 손에 땀나게 지켜봤다. 다른 오락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미련한 반달곰’은 자신이 정치상황의 볼모인 줄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고, 죽은 곰의 쓸개 역시 야생인지 사육용인지 확인되지 않은 채 회사이름이 곰을 상징하는 한 제약회사에 팔려나갔다.
세월이 흘러 올해 4월말, 충북 진천에 ‘반달곰’ 한 마리가 다시 나타났다. 이 놈은 TV 카메라에 잠시 비친 뒤 한 달 가까이 언론과 환경당국의 시야를 벗어났다가 21일 밤 사로잡혔다. 잡고 보니 반달곰이 아니라 불곰이었다. 죽지 않고 잡힌 것도 81년과 달랐다.
그러나 ‘1981년의 반달곰’과 ‘2000년의 불곰’이 미욱하게 인간들에게 놀아난 점만은 놀라울 정도로 닮은꼴이다. 전자가 80년대초 ‘정치의 대체물’이었다면, 후자는 새 세기에 새로운 생활방식을 지향한다는 ‘환경 물신주의(物神主義)의 희생양’이었다는 점에서 그 양상이 다를 뿐이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멸종된 줄 알았던 ‘반달곰’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정말 그렇게 반가웠던지, 환경부는 이번에 소동을 빚은 곰이 지난해 인근 사육장을 탈출한 놈이라고 추정하면서도 짙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사육곰을 풀어놓고 ‘야생곰 발견했다’고 떠드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야생곰, 정확히 그런 곰의 웅담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엄존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 반달곰 소동의 이면에는 ‘자연’ 또는 ‘손상되지 않은 환경’에 대한 갈구라기보다 어떻게든 그 자연과 환경을 ‘나만의 것’으로 독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천박한 욕구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환경 물신주의’다.
서울시민의 상수원 팔당호 주변을 ‘나와 내 가족만 즐길 수 있는 정원’으로 삼기 위해 그곳에 고층아파트를 짓는 행위나, ‘자치단체의 세수확대용 테마파크’를 건설하려고 전 국토를 짐승 내장 까뒤집듯 헤쳐대는 짓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두면 될 것을 왜 침 발라 꼭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가.
어디어디 갯벌이 좋더라는 말을 듣기가 무섭게 수백명씩 떼지어 꽃삽과 자루를 들고 조개 캐러, 게 잡으러 몰려드는 ‘천혜의 환경’도 ‘배반의 현장’일 뿐이다.
이번에 반달곰이든 불곰이든 그놈이 차라리 뱃속의 웅담을 꼭꼭 싸안고 심산으로 숨어 인간의 가소로운 짓을 한바탕 비웃어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첫 발견장소로부터 불과 500m 떨어진 곳에서 다시 잡혔다니 정말 미련하긴 미련한 놈인가 보다.
김창희<기획취재팀장>ins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