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씨는 “통신주만 사면 대박 터진다고 하더니…. 본전 생각에 묶여 이 지경까지 왔다”며 “1억원만이라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그저 매일 죽고 싶은 생각뿐”이라며 울먹였다.
지난해초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증을 딴 L씨(39). 개원에 앞서 잠깐 재테크나 하자며 건축비용 1억5000만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3분의 2를 까먹었다. 그는 “처가에서 빌린 1억원을 다 날려 이젠 개업의 꿈을 접고 다시 취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종합주가지수가 700선을 거쳐 끝없이 무너지면서 정신적 공황을 겪는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P, L씨는 실제 현대증권이 운영하는 ‘투자클리닉센터’(서울 강남구 대치동)를 최근 방문해 상담했던 개미군단의 일원들.
4월말 현재 증권거래소와 코스닥을 합친 주식투자 인구는 350만명. 지수 영향력이 큰 몇몇 종목을 제외하고는 현재 대부분 종목의 주가가 외환위기 직후보다 낮아 개미군단의 주가체감지수는 사상 최악이다.
고시준비생 K씨(28)는 아버지 퇴직금 3억원 중 1억2000만원을 주식에 투자했다. 지난해 행정고시 1차 합격 뒤 잠깐 짬을 낸다는 것이 8000여만원까지 날리고 보니 이제 2차시험까지 포기하고 주식에 매달린 상태.
그는 “하루 빨리 고시에 붙어야 아버지 돈을 조금이라도 갚을 텐데 ‘단기간에 돈 버는 방법’ 같은 책에만 손이 간다”고 하소연했다.
Y씨(30·여)는 지난해 우리사주로 3000만원을 챙긴 뒤 혼수용 저축까지 합쳐 7000만원을 주식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현재 수중엔 2000여만원뿐.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 잔다는 그녀는 올 여름 하려던 결혼까지 미뤘다.
‘대박’의 보증수표로 여겨지던 우리사주도 이제 애물단지이긴 마찬가지.
현대증권의 한 과장은 지난해 우리사주를 주당 2만6000원에 받았다. 당시 주가는 5만9000원. 그러나 최근 5000원대로 내려앉아 손실액이 2000만원선에 이른다.
지난해 증자한 재벌그룹이나 증권사의 직원들은 경쟁적으로 우리사주를 받았지만 요즘 적게는 수백만원, 많게는 수천만원씩 손해보고 있는 게 현실. 이에 따라 회사를 더 다니자니 일이 되지 않고 털고 나가자니 원금 생각이 나 우리사주가 ‘현대판 노비문서’라는 말이 과히 틀리지 않는다는 얘기들이다.
변화폭이 큰 코스닥시장 투자자들의 손해도 막심하다. H씨(50·자영업)는 금융주에서 1억원을 날리고 코스닥에서 만회하겠다고 뛰어들었다가 더 깨진 경우. 그는 “어차피 ‘묻지마 투자’식으로 하다 보니 이 지경이 됐다”며 망연자실해했다.
축산업자 K씨(38·충남예산)는 10년간 소 돼지를 키워 모은 1억원을 코스닥에 넣었다가 구제역 발생으로 급전이 필요해 5000만원선에 팔아치운 경우. 그는 “투자종목이 90% 가까이 빠져 그 직전에 절반 건진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화를 속으로 삭이지 못한 투자자들 중에는 ‘마지막 길’을 택한 사람도 없지 않다.
지난달 18일 주부 박모씨(30·대전 둔산동)는 남편의 증권투자 실패에 비관, 세살배기 아들과 함께 약을 먹고 동반자살을 기도했으나 아들만 숨졌다. 박씨의 남편은 1억5000만원을 날린 뒤 최근 다시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은행원 양모씨(49)도 지난해 1월 명예퇴직 뒤 퇴직금 2억원으로 주식을 샀다가 다 날리고 빚 내서 투자한 5000만원마저 반토막 나자 2월 중순 목을 맸다.
이같은 ‘마지막 길’의 문턱까지 간 주식투자 실패자들을 상담하는 투자클리닉의 하용현(河容鉉)부원장은 “올해 폭락세가 이어지면서 주식브로커와 점(占)집까지 두루 다 거친 탈진 상태의 ‘환자’들이 매달 1000여명씩 몰려오고 있다”며 “이렇게 정신적 공황에 빠진 사람들에겐 하루라도 빨리 주식에서 손떼라는 조언 외에는 할 말이 없어 우리도 답답하다”고 말했다.
<허문명·이승헌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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