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봄호로 98권째가 발행된 계간 ‘한국학보’. 언제부터인가 이 잡지 판권란에는 보기드문 사은의 글이 실린다.
‘한국학보를 간행하는데 도움을 주신… 경일제책사 이약실 사장님께 감사한다.’
이약실 사장(61). 저술가도 대기업의 오너도 아니다. 그가 23년째 경영하는 직원 30명 남짓의 경일제책사는 인쇄된 종이들을 실로 꿰매거나 풀로 발라 묶고 표지를 입히는 제본회사. 그런데 이 작은 제본사가 ‘한국학보’를 몇 년째 무료로 제작해주고 있다.
이사장의 ‘은혜’을 입은 책은 ‘한국학보’만이 아니다. 현대실학사는 ‘한용운산문선집’‘다산문학선집’등 10권의 책을 거저 제본받았다. 이산출판사의 30대 사장은 첫 책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를 찾으러 갔다가 “사장님이 제본비는 청구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떤 책이 ‘공짜 제본’의 대상이 되는지는 도움을 받는 사람조차 책을 인수하기 직전까지는 모른다. 제본을 맡은 책은 무엇이든 1차 독자가 되는 이약실 사장이 한해 한종 꼴로 “이 책이야”라고 직원들에게 통보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책이 ‘이약실상’을 받았는가는 출판사 사장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진다. 그저 지난 10여년간의 경험으로 “단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책의 완성도가 판단기준이다” “보존가치가 높은 양장본을 대상으로 한다” “한국학 연구의 빈 곳을 메우는 국내저술에 관심이 크다”를 선정기준으로 어림짐작할 뿐이다. 단 한번 거래로 공짜제본의 영예를 안았던 풀빛출판사의 30만원짜리 책 ‘고구려고분벽화’나 ‘한국의 전통건축’(문예출판사) ‘한국의 고지도’(범우사) 등의 목록이 그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이약실사장을 회사로 찾아간 일은 예상대로 허사로 끝났다. 공짜제본을 해준 출판사의 답례조차 피해 다니는 그가 기자를 만나줄 리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가는 제본소 풍경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울 용산구 서계동 서부역 건너편 경일제책의 3층 공장. 하루에도 수만장의 종이가 잘리고 묶이는 공장임에도 바닥은 수술실처럼 깨끗했다. 늘 기계 옆에 살다시피하는 이사장이 “기계에 먼지가 끼면 책을 버린다”며 기계 틈새로 플래시를 비추어 몸소 먼지를 닦아내기 때문이다. 이런 정성 때문에 꼼꼼한 수작업¤새로운 실험을 해야하는 제본작업은 경일의 몫이었다. 열화당미술문고를 디자인했던 정병규씨는 “양장본과 소프트커버의 장점을 고루 취하는 새로운 제본을 요구하자 제본사들이 모두 거절했다. 결론은 경일에 매달리자는 것이었다”고 회고한다.‘속도’가 화두가 된 시대지만 경일제책사는 소걸음이다. 기계 속도를 올리면 하루 2000∼3000권을 뽑아낼 수 있어도 경일은 1000권의 책을 옛 방식 그대로 만든다. 경일의 고집을 아는 출판사들은 양장본의 경우 책의 자리가 잡히도록 1주일 정도 책을 재울 시간이 없으면 아예 제본을 맡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최소 10년, 많게는 창사 때부터 이약실사장과 함께 회사를 지켜온 사원들은 사주 만큼이나 입이 무거웠다. 그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사장님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자식들이 보아서 부끄럽지 않을 책을 만들자고 하셔요”가 전부였다. 올해의 ‘이약실상’ 수상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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