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그에게서, 이른바 N세대의 정서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통의 아날로그 어법을 동원해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다소 '뜨악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설 땅은 어디인가. 그는 아마도 좀더 전통과 옛것으로의 회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실험하는 듯하다.
새 영화 제목을, 다분히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정>이라 이름붙인 것도 그같은 고집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의 이 고집은 이미 전작 <러브 스토리>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러브 스토리>에는 영화속 감독이 제작자를 만나는 장면이 몇번 나오는데 제작자는 감독에게 줄곧 "거, 왜 있지 롱테이크 좀 그만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러브 스토리>에는 오히려 롱 테이크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 역설적이게도 <러브 스토리>의 가장 큰 미학적 장점은 바로 그 롱 테이크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배창호의 미덕 역시 그런 고집에서부터 비롯되어지는 듯이 보인다.
영화 <정>은 191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담아 낸 내용이다.
전통 혼례를 치르고 꼬마 신랑에게 시집간 여인 순이는 시어머니의 모진 학대를 받는다. 신식 교육을 받은 남편은 도시 처녀를 임신시켜 집으로 데리고 들어 오고, 결국 그녀는 시집에서 자의반 타의반 쫓겨 나온다.
친정집에서 외롭게 혼자 살던 순이는 옹기장수에게 보쌈을 당한다. 순이는 이 남자가 무식하지만 순박한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되고 그와 살림을 차린다.
하지만 그녀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 주던 옹기장수는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고 순이는 또 혼자가 되고 만다. 초근목피로 어렵게 삶을 이어 가는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 날 굶어 죽기 직전의 한 여인이 아기를 안고 그녀의 집에 나타난다.
자식없이 혼자 외롭게 살아가던 순이의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야기의 흐름상으로는 영화제목이 <정>이 아니라 <한>이 됐어야 했다.
꼭 영화속 얘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부모 세대들의 삶은 지겹도록 구차하고 모진 것이었다.
특히 얘기의 초점이 여인의 삶에 맞춰지면 그 지난함의 순도는 배가 된다. 어머니들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한이 맺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많은 삶을 구비구비 잇게 해준 것은, 순간순간이나마 산다는 것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창호감독의 풀이대로라면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사이의 '정'이라는 것이다.
배창호감독은 '정'이야말로 디지털과 인터넷, 주식열풍이 온 세상을 뒤덮고 한때의 민주투사가 룸살롱의 여인 품에서 방황하며, 가장 도덕적일 것 같았던 시민단체 지도자가 강간 미수범으로 구속되는 이 혼탁한 시대에 있어, 조심스런 희망과 같은 것이라고 얘기한다.
'정'의 정서를 되찾자는 것이다.
영화는 사계절을 담아 내느라 촬영 기간만 꼬박 1년이 넘게 걸렸다.
1910년대의 근대적 생활풍속에서부터 산업개발기의 60년대까지를 표현하기 위해 극 전반이 꼼꼼한 고증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전통 혼례의 모습에서부터 옹기를 만드는 것, 독특한 구애방식인 '보쌈', 그리고 영화속 곳곳에 베어있는 질펀한 우리가락 등등 의외로 옛날을 생각하며 느긋하게 즐길만한 볼거리가 많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아들이 용돈을 모아 어머니에게 사다 주는 비타민 약병은 30대 이상의 관객들에겐 아주 낯익은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 몰래 빈 도시락속에 집어 넣어 딸그락대는 약병 소리는, 영화가 그간의 잔잔한 리듬을 깨고 관객들 감정의 기복을 한껏 높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세대들로서는 <정>과 같은 얘기를 마치 도덕교과서의 첫장에 나오는 암기품목으로 받아들일 공산이 크다.
이런 영화가 요즘 인기라는,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랩송과 양립하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할 장년층이 극장을 자주 찾는 것도 아니다. 배창호감독의 뚝심이 외로워 보이는 것도 그같은 이유때문이다.
주연은 전작 <러브 스토리>에 이어 배창호감독의 부인인 김유미씨가 맡아 '나름대로' 열연을 펼쳤다. 감독과 주연배우가 부부관계란 것이 영화 흥행의 악재가 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배창호감독 부부에게는 바로 그 점이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오동진(ohdjin@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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