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법망(法網)이 이렇게 허술한가

  • 입력 2000년 6월 4일 19시 39분


구치소 의사의 엉터리 진단서를 믿은 법원의 구속집행정지 결정, 사설경호업체에 맡긴 일시석방 피고인의 동향감시, 위조여권을 이용한 피고인의 출국….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거액의 수임료와 뇌물로 변호사 의사 경찰관 등을 매수해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중국으로 달아난 사기범 변인호(卞仁鎬)씨 사건은 피고인 신병관리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변호사가 구치소 의사에게 “변씨가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직접 뇌물을 주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법원과 검찰이 피고인 또는 피의자의 신병관리 제도 및 운영절차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고 하루빨리 대책을 세울 것을 촉구한다. 물론 현행 형사소송법은 법원이 구속 피고인의 주거를 제한해 구속집행을 정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법원이 주로 구치소 의사의 진단서를 근거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구치소 의사의 진단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검증할 장치가 없다. 일시 석방된 구속피고인에 대한 허술한 감시체계도 문제다. 관할 파출소가 2개월에 한차례 이상 동향을 파악하도록 한 것이 고작이다.

12억원대의 사기행각을 벌여 최근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이 확정됐으나 대법원의 선고가 있기 하루 전날 미국으로 달아난 변호사 박병일(朴炳一)씨 사건에서 보듯 불구속 피고인 또는 피의자의 출입국관리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속철도 차량선정 로비의혹 사건의 주범 혐의를 받고 있는 최만석씨의 경우도 검찰이 행적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출국금지 상태에서 미국으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씨의 출국을 놓고 법원과 검찰이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딱한 노릇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책임소재가 아니라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 만인에게 평등한 법의 존엄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불구속과 무죄추정의 원칙은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일관성 있게 유지해온 형사소송의 기본원칙이다. 따라서 앞으로 불구속재판은 계속 확대될 것이고 이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불구속 피고인의 실형이 확정되면 이를 철저하게 집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가동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인권을 보호하면서 법의 형평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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