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정몽구와 정문술

  • 입력 2000년 6월 8일 19시 43분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장교들을 분류하는 기준이 있다.

판단력과 용맹성 두 요소를 모두 갖춘 사람부터 둘 다 부족한 경우까지 상대 평가를 통해 4그룹으로 나누면 이 가운데 최고 지휘관에 오른 사람은 용맹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판단력이 뛰어난 그룹에서 많이 나온다는 통계가 있다.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지휘관의 판단력이 부족해 북쪽에 파야 할 참호를 남쪽에 파도록 하면 그 군대는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머리도 좋고 용맹스러운 사람들은 최고 지휘관에 오르기 전 치열한 경쟁 과정에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서로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재미있는 분석이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그 역할이나 기능에서 군대의 지휘관과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에 이 기준이 유효하다면 최근 화제를 뿌렸던 두 명의 최고 경영자들인 정몽구현대자동차회장과 정문술미래산업사장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인물로 분류될까.

나는 두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 단지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 사이 거의 같은 시기에 서로 상반된 행동을 한 두 사람을 지켜본 후 호기심에서 수소문을 해 알아보았을 뿐 아직도 두 사람과는 전화 한 통화 한 적이 없다.

자료를 통해 본 두 사람은 기업을 소유하게 된 태생부터가 달랐다. 정몽구회장이 현대 창업자인 정주영전명예회장의 안전한 벌집 속에서 ‘로열젤리’를 먹고 큰 사람이라면 정문술사장은 온갖 세파와 풍상에 시달리면서 ‘빗물에 젖은 밥’을 먹다가 마흔다섯의 나이에 늦깎이로 사업을 시작한 인물이다.

전자가 96년 현대의 대권을 이어받아 1200여명에 달하는 매머드급 임원진의 보좌를 받으며 카리스마를 행사할 때 후자는 빚더미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은행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려야 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은 남을 때와 떠날 때를 선택하는 모습이었다.

현대차 정회장은 “3부자가 동반 퇴진해 현대를 살리자”는 아버지의 말에 반발하고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내가 왜 전문 경영인이 아니냐’는 항변에 정전명예회장조차 이의를 제기했다지만 그는 지금도 회장의 자리에 있다.

‘3부자 퇴진’이 발표되던 날 그는 여러 번 태도를 바꿨다. 발표 직후 반발했다가 ‘왕회장’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그 자리에서 나와 다시 번복했다가 가족간 저녁식사 때 또 한번 승복의 모습을 보였지만 그 날 밤 현대차 임원들과 만난 후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자리를 고수키로 한 것이다. 우유부단한 것으로 비쳐진 그의 행동은 경영인의 가장 긴요한 요소인 판단력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말들이 무성하다. 그가 이번에 확실히 보여준 것은 창업자이자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용맹성이었다.

비슷한 날 정문술사장은 자신이 일궈 온 인터넷 포털서비스 업체 라이코스코리아 대표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 회사 후임 사장은 미국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던 33세의 한국인이다. 자본금 1억원으로 차린 회사를 1년 만에 3600억원짜리로 키워 놓고 그는 “평생 돈 문제 하나는 극복하고 싶다”며 홀연히 자리에서 물러나 ‘뒷방 늙은이’를 자임한 것이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창업 후 1년은 나처럼 모험심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 수익으로 연결시키려면 젊은 감각의 경영자가 필요합니다. 물러설 때를 아는 것도 경영자의 자질이며 덕목입니다”라고 말했다.

올해 예순둘인 정문술사장에 대해 벤처하기에 나이가 많다는 말은 아무도 안한다. 이른바 벤처 1세대의 대부격인 그를 두고 후배 벤처인들은 “젊은 정신이 젊은 나이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쳐 준 분”이라고 할 정도다. 그런 그가 ‘젊은 감각의 경영자 영입을 위해’ 자리를 물러난다니 우리 기업사에 이렇게 겸손하고 아름다운 퇴진이 어디 또 있었던가. 판단력이 뛰어난 경영인임에 틀림없을 성싶다.

회사의 최고 경영자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그 기업 자신이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는 정부의 지시나 여론의 압력은 온당하지 않다. 기업이 선택한 최고 경영인에 대해서는 시장이 그의 능력을 평가할 것이며 그 기업의 흥망성쇠도 그 때 함께 결정될 것이다. 이제 관심을 갖고 두 기업의 미래를 지켜보기로 하자.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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