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민족의 지도자’를 위하여

  • 입력 2000년 6월 12일 19시 37분


광복군(光復軍)장교 출신인 고(故) 장준하(張俊河)선생은 철저한 ‘박정희(朴正熙) 반대자’였다. 선생은 한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하며 “광복군 출신인 내가 일제 관동군 출신인 박정희에게 질 수는 없다. 그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못할 순 없다”는 말을 되뇌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던 선생도 1972년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밝힌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민족의 쾌거’라며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7·4 공동성명’은 사실상 남북 정권의 체제강화를 위한 ‘위장된 해프닝’에 불과했다. 박정희대통령은 석달 후 ‘남북의 대화 속 대결’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대응해야 한다며 ‘10월 유신’을 선포, 종신집권체제를 갖췄다. 북한정권도 그 해 12월 주석직을 신설하는 등 유일체제를 강화했다. 남북 정권의 ‘적대적 의존관계’는 남북대결구도를 심화시켰을 뿐이다.

▼‘평화선언’ ‘자주선언’▼

그로부터 28년이 지나 남한의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오늘부터 사흘간 평양에서 열린다. 지하의 장준하선생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그 영혼이나마 박수를 보낼 것이다. 물론 남북문제를 정서적 감상적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남북정상회담은 55년 분단의 벽을 넘어서기 위한 첫걸음에 지나지 않으며 섣부른 기대는 다시 환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번 남북 정상의 만남은 그 자체로 ‘세기적 세계사적 민족사적 대사건’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상징성은 고은(高銀)시인의 말처럼 ‘끊어진 허리를 이어 한 생명을 되살리는 것’이요, 세계 속의 마지막 냉전지역인 한반도의 ‘평화선언’이자 외세를 향한 한민족의 ‘자주선언’이다.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눅들고 찌들은 남북 민중의 병든 의식의 건강성 회복이자 대립과 분열을 털어내는 7000만 겨레의 하나됨이다.

그러나 이같은 상징성이 뼈를 얻고 살을 붙여 실체적 형상으로 거듭나려면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식의 대전환과 실천의지가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역사적 과업은 남북 지도자가 주도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대통령은 이제 ‘민족적 지도자’의 면모를 보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정치의 이해를 초월해 역사의 대임(大任)을 수행해나가는 대정치가의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총재는 상호주의를 남북회담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대사(大事)에 까탈부리는 게 아니냐고도 하지만 이는 남한 내 보수적 중산층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총재와 한나라당은 남북정상회담이 국내정치적으로 그들의 입지를 왜소화시킬지도 모른다는, 나아가 집권세력이 이번 정상회담의 성과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들지 않을까 의심하는 듯도 싶다.

김대통령은 이같은 보수층의 우려와 야당측의 의심을 당당하고 투명하게 불식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정도(正道)의 정치를 펴는 길밖에 없다. 수의 논리에 집착해 이미 도덕적 명분을 상실한 DJP공조에 매달릴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널리 인재를 동원해 국정을 일신하는 큰 정치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코리아 드림팀’으로 새바람을 일으키고 국민에 희망을 안겨주어야 한다. 정파의 이익과 정권재창출에 급급하는 ‘책략의 정치’로는 안된다.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자기 몸을 던질 수 있는 ‘큰 정치’를 해야 한다. 파당과 대립, 권모술수로 얼룩져온 ‘3김식 정치’의 사슬은 단호히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기회 잘 살려야▼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국회의 수적 우위가 필요하다는 것은 수긍할 만하다. 집권세력이 정권재창출에 힘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이해를 앞세우면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세계사적 민족사적 상징성을 구체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북의 대화 속 화해’와 공존공영이란 새로운 역사의 장(章)을 열어나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안된다. 특단의 인식전환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YS정권 초기 대통령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정남(金正男)씨는 이렇게 말한다.

“DJ는 지금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역사는 그를 외피(外皮)만 화려했던 호남정권의 지도자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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