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드라마였던 이 연극은 그동안 수수께끼의 인물로 ‘은둔’해 있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전세계 앞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김위원장은 특유의 복장과 안경, 굽 높은 구두로 꾸미고 트랩에서 내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는 15일 공항에서 김대통령 일행을 떠나보낼 때까지 툭툭 던지는 농담과 파격적인 제스처로 전세계인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김대통령도 그의 제스처에 차분히 응대하면서도 솔직히 할 말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언행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는 다음에 이뤄질 정상회담, 이른바 ‘제2막’에서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과거 남북교류를 위한 여러 시도들은 어이없는 단막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은 폐쇄된 밀실이 아니라 전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공개적 약속을 천명했기에 또 다른 무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번째 무대는 연기에 들뜬 첫 무대와는 달리 냉엄한 현실을 배경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기에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우선 이번에 합의된 내용들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한반도와 이해가 깊게 얽힌 주변 4대 강국, 즉 대륙권에 속하는 중국 러시아와 해양권에 속하는 일본 미국으로부터 원만한 협조를 얻어내야 할 과제가 있다.
서로 다른 체제를 넘어 공존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법률, 제도의 개혁, 이산가족 문제, 경제협력 등의 난제들도 풀어야 한다. 이처럼 산적한 난관 앞에서 무엇보다 우리 내부에서 여야간, 보수세력과 진보세력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숱한 장애들을 넘어서는 일은 정치권과 재계만의 과제는 아니다. 남북 민족간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민운동, 비정부기구(NGO)운동의 조직적 참여가 중요하다. 정권이나 기업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민족 공영의 이념을 정립하기 위한 의식전환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만큼 이를 추진해야 할 민간단체의 역할은 막중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지난 55년간 대결적 정치이념과 함께 국민생활의 전분야가 이질화된 현상태를 그대로 두고서는 민족화합을 이뤄낼 수 없다. 남북간은 언어 생활관습 문화의 전영역에 걸쳐 이질화가 심화되어 있다. 그러나 낙관적으로 본다면 우리 민족이 수천년간 이뤄온 동질성에 비하면 이질화의 정도는 적다고 할 수도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장시간 마라톤 회의를 하는 동안 정상간에 통역 없이 회담을 원만히 진행하지 않았던가. 특히 남북간 문화의 각 분야가 주체가 되어 민간교류를 진행하고 양쪽 정부와 기업들이 뒷받침해주면 훌륭한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제는 ‘남북 민족간 서로돕기 운동’에 더욱 힘을 실어야 한다. 당장 겨울이 닥쳐오면 북한에서는 에너지 부족으로 난방이 안될 뿐만 아니라 내복조차 없이 지내는 동포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못 본 체하고 한 동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동포애로 내복을 보낸다면, 그것은 동포의 추운 몸을 감싸주는 따스한 사랑으로 차디찬 빙벽(氷壁)을 녹이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 밖에 식품이나 의약품 등 시급한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 남북 동포의 평화공존과 통일은 한반도의 흥망과 관계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21세기 전세계의 평화와 직결된다. 이번 회담에서 남북은 먼 통일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북한 동포들이 “가는 길 험해도 웃으며 가자”고 하듯이 이제 남북은 험한 길이라 하더라도 굳게 손잡고 이를 헤쳐 나가야 한다.
강원용(크리스챤 아카데미 이사장·21세기 평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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