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도착한 김대중대통령을 비행기 트랩 바로 아래까지 다가가 반갑게 맞이하고, 승용차를 함께 타고 백화원영빈관으로 향했는가 하면, 함께 사진 찍고 담소하는 모습들을 여과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다음날도 김위원장은 그의 거침없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괄괄한 육성과 함께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를 지켜보던 남한 국민과 전세계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김위원장의 이런 모습과 태도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80년대에 발간된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수기 ‘김정일 왕국’에 기술된 김정일 비서의 모습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드러난 김위원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대숙 교수의 ‘현대 북한의 지도자’와 97년 귀순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서도 김위원장의 다양한 행적이 상세히 기술돼 있으며 그 모습은 이번에 우리가 본 것과 다르지 않다.
이를 종합하면 김위원장은 남한 사정이나 세계 정세에 대해 해박하고 균형된 지식과 감각을 갖고 있고, 본인과 북한의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예리함과 유머감각을 겸비하고 있는 것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이번에 드러난 인간 김정일의 활달함 속에는 고독감마저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우리네 안방에 찾아온 김위원장에 대해 전세계가 놀라움과 충격을 받았던 것은 첫째, 그동안 공식 매체를 통해 알려진 김위원장의 행적은 특정 행사와 관련된 모습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김위원장은 1992년 4월25일 인민군 창건기념일에 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병들에게 “조선인민군에 영광 있으라…”라는 단 한마디만 마이크를 통해 짧게, 엄숙한 표정으로 발언했는데 이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공개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그의 육성이었다. 노동신문 1면을 장식하는 엄숙한 스틸사진이나 최고인민회의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이러한 그의 이미지를 고정화하는 데 일조했다.
둘째, 김위원장 스스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부대 시찰이나 현지 지도 모습은 기념사진만 공개됐고, 각종 기념행사에 직접 자리를 함께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더구나 김위원장의 모습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보도될 수 있는 해외여행도 1983년 중국 방문뿐이다. 이번 정상회담 기간에 김위원장 본인도 비공개로 여러 나라를 방문했기 때문에 자신이 은둔생활하는 것처럼 서방 언론에 비쳐졌다고 말했다.
셋째, 김위원장에 대해 남한이나 세계 언론이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이미 김위원장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증언과 학문적 연구가 축적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에 관한 부정적 시각이나 편견에 기초한 소문 등이 마치 그의 진짜 모습인 양 부각되었다. 북한 내에서 지도자 김정일에 대한 과도한 우상화작업은 이러한 부정적 시각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이번에 우리 눈앞에 실체를 드러낸 김위원장은 결코 과거의 그 김정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 남한 국민과 세계 언론에 어떻게 비쳐질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위원장 스스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그가 더 이상 은둔의 지도자가 아니며 동시에 신비로운 존재도 아님을 알려주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뜻한다.
폐쇄체제의 신비로운 수령이 아니라 보다 정상적인 국가의 보통 인간의 모습을 한 정상적인 정치지도자로서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발전시키겠다는 변화의 극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김위원장의 사고의 전환이 정책의 전환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보다 평화로운 한반도, 공존공영의 남북관계 진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우리도 인간 김정일과 있는 그대로의 북한 모습을 바라보는 안목을 길러 나가야 한다.
유호열(고려대 교수·북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