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몽준/北 월드컵의 門도 열었으면

  • 입력 2000년 6월 18일 18시 51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평양에서의 2박3일은 현대사에서 몇번 안되는 ‘국면 대전환(Volte-face)’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경험이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공항 출영에 이어 시내에 운집한 환영 인파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환영 인파의 정확한 수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60만명이라면 우리나라 군인을 모두 한자리에 모은 셈이니 그 규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국면 대전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김위원장은 최근 ‘통 크게 놀자’라는 말을 자주 해 왔다고 한다. 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은 당시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라는 외세 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고 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는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남북공동선언은 남북 정상이 이니셔티브를 행사해 이뤄진 국면 변화라는 데서 그 진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북측에서는 현 국제 정세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는 현실주의적 노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과의 모든 정치 군사 경제 협력을 논의할 때 북측이 주한 미군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북측에서도 주한 미군의 성격에 관해 반드시 북한만 겨냥하고 있다기보다는 극동 지역의 세력 균형 유지자로서의 역할을 일부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느껴졌다.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 15일 환송 오찬장 연설에서 김대중대통령을 ‘각하’라고 호칭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북한 내의 분위기가 며칠 사이에도 얼마나 달라져 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숙소인 주암초대소는 대동강과 평양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에 있었다. 대동강과 나란히 있는 구릉을 따라 올라가면 을밀대가 있고 거기서 다시 올라가면 주암초대소가 있다. 평양은 세계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세워진 도시로 ‘평양’이라는 한자 의미대로 넓은 도시라는 인상이 깊었다.

내가 지난해 말 평양에 갔을 때 안내원이 평양의 봄과 여름은 파리만큼이나 아름답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과연 6월의 평양은 나무가 많고 거리가 잘 정돈돼 도시 전체가 공원처럼 느껴졌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의 벨라판 사무총장은 평양을 자주 드나들면서 김일성주석과도 만난 일이 있는데 평양의 아름다움을 오스트리아 빈과 비교하기도 했었다.

주암초대소에서는 대동강과 능라도(5·1)경기장도 내려다보였다. 15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 세계 최대 경기장으로 꼽히는 이곳에서 2002년 월드컵 경기 중 일부를 열자는 것이 우리측 제안이다. 월드컵 예선전 두 경기만 개최해도 30만명의 관중이 시합을 관람할 수 있다. 북한에서 월드컵 경기 일부를 개최하자는 안에 대해 처음에는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회장과 국내외 인사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북측도 왜 32경기 중 2경기만 북한에서 해야 하느냐, 또 일본과 공동 개최하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시했었다.

그러나 이번 북측과의 실무 협의에서 북측은 “원칙적으로 찬성하며 남북정상이 합의해 지시만 내린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큰 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방북 기간에 받은 느낌 가운데 기억나는 것은 북측이 모든 것에 자신이 있어 보인다는 점인데 이는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북 관계를 풀어 가는데 있어서 어느 한쪽이라도 자신이 없으면 일이 잘 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시작된 국면 변화는 그야말로 정성들여 디딤돌을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쪽이 함께 협력한다는 호혜적 자세와 상호 신뢰가 가장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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