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배창호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시키는 영화 '정'

  • 입력 2000년 6월 23일 11시 06분


<천국의 계단>의 실패 이후 배창호 감독이 <젊은 남자>를 발표했을 때 나는 "90년대의 시대적 맥락에서 배창호의 작가 역량이 쉽게 소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반쯤 맞고 반은 틀렸다. 배창호의 작가 역량은 소진하지 않았지만 90년대 이후의 시대 맥락과 그의 태도가 조응한 것은 아니다. 배창호의 태도는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시대의 호흡을 놓친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더 깊어지고 있는 징후로 보여지기도 한다.

<천국의 계단>과 <젊은 남자>와 <러브스토리>로 이어지는 90년대의 배창호 작품 이력은 최악이었다. <천국의 계단>은 거의 종교적으로 여겨질 만한 화해의 태도로 스타 여배우의 정신적 구원을 다뤘지만 바닥에 깔린 70년대 식 통속 소설의 감상주의를 돌파하지 못했다. 그것은 80년대 한때 최고의 스토리 텔러였던 배창호 감독이 이야기 감각을 잃어버린 채 안이한 화해를 주창하는 헛된 몸짓처럼 보였다.

<젊은 남자>는 강남의 소비청년 문화를 배경으로 한 젊은이의 야망과 몰락에 접근했지만 흥미롭게도 배창호가 주인공 이한을 보는 시각은 80년대에 만든 <고래사냥>에서 병태를 봤던 시각과 조금 다르다. 병태가 타락한 세상을 거부하고 돌파하는 방법으로 동해의 고래를 잡으러 떠난다면 이한은 돈과 명예를 요구하는 세상에 대해 삶의 진정한 이상을 내세우는 고전적인 대응방법이 아니라 바로 그 돈과 명예를 얻어내고자 처절하게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 남자>는 그런데도 이한 영혼의 내면 심연까지 파고 들어가 선과 악의 갈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근본적으로 착한 남자이고 다만 속화된 세상의 매개자이며 희생자일 뿐이다. 이 영화의 배경묘사가 수박 겉 핥기처럼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배창호의 선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세계를 이해할만한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 영화의 세부에 담긴 젊은이들의 소비 세계는 배창호가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그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지만 (배창호의 최고 흥행작인) <깊고 푸른 밤>의 원형 카메라 이동을 연상시키는 후반부 이한의 독백 장면은 기법주의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저력이 있다.

<젊은 남자>는 비록 미완의 시도였지만 배창호가 동시대의 감성을 자기 틀로 잡아내려는 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일면 다음 행보를 궁금하게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배창호는 <러브스토리>에서 더욱 개인적인 세계로 들어갔다. 반 자전적인 특징을 띠는 <러브스토리>는 "사랑이란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그 다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이라는 투의 매우 상식적이고 착한 인식의 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재미있는 부분, 곧 한때 한국 최고의 인기감독이었으나 거듭된 흥행 실패로 위기에 처한 영화감독의 초상이 간간이 삽입된 부분을 빼면, <러브스토리>는 배창호 감독의 세상관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엔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선한 태도에 기울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그의 윤리관은 복잡한 세상과 맞서기에는 지나치게 단조롭고 교과서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은 이제 어쩔 수 없이 배창호의 영화는 배창호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수긍하게 하는 저력이 있음을 실감시킨다. <정>은 어머니 세대의 고생스러운 삶을 평면적으로 응축한 진부한 내용을 갖고 있지만 이제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넘어간 그 이야기 소재로 배창호는 감동을 준다.

색다를 것 없는 이야기지만 정교한 세부묘사의 힘으로 그저 예쁘기만 화면이 아니라 착한 주인공의 심성과 조응하는, 세상과 대립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화해하며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삶의 태도를, 심성을 자연의 유려한 풍경에 옮겨놓았다. 이 영화의 색감과 화면 구성과 신중하지만 정교한 카메라 움직임은 한국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큰 기와집과 초가집의 풍광,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부엌, 다드미질을 하는 골방의 정갈함 등 이제 한국영화와 실제 삶에서 느낄 수 없는 정서를 온전히 살려놓으면서 우리 전통 가옥의 아름다움을 재현했다. 거의 민속지 영화로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착하고 맑은 영화인 <정>에서 주인공 순이를 비롯해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아주 선량한 심성의 인간들이다. 순이는 그렇게 선량하게 산 대가로 노년에 자그마한 행복감을 만끽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행복의 척도인 물질적 기준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턱없이 비현실적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쓱 흔적 없이 우리를 베고 지나가는 투명한 거울 같은, 속도전의 경쟁에 휘말린 근래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미덕을 전해준다.

제도와 관습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소통했던 지난 시대의 한 모습을 긍정적으로 담아내, 착한 심성을 완벽하게 화면에 잡아냈으며 위악적이고 과시적인 현대 영화의 흐름과 떨어져 나와 과거의 삶에서 끄집어낸 포근한 목소리인 것이다.

배창호 감독은 80년대 한국영화의 대명사였다. 80년대 중반까지 그는 재주 있는 이야기꾼이었으며 80년대 말의 그는 대상을 정관 하는 명상가였다. (개인적으로 그의 최고작은 그 시기에 내놓은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너무 쉽게 화해하고 너무 쉽게 용서하는 감독이지만 세계와 팽팽한 대립 관계를 맺지 않는 그 선한 긍정적 세계관에서 그는 이제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정>은 한국영화가 오랫동안 너무 잊고 있었던 배창호 그 사람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시키는 작품이다.

<김영진(hawks@film2.co.kr)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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