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도정일/'문화유전자'는 길들이기 나름

  • 입력 2000년 6월 28일 18시 52분


인간 유전자(게놈) 지도가 완성됐다는 것은 아닌게 아니라 큰 사건이다. ‘몸’은 플라톤이 생각했듯 그 자체 아무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망각의 자루’가 아니다.

서사시 ‘오딧세이아’가 24장으로 구성돼 있다면, 몸은 23장(23개 염색체쌍)으로 짜여진 세포핵들의 유전자 집단, 곧 ‘유전자 책’이다. 지금까지 신의 비밀 장부로 남아 있던 그 책을 인간이 읽어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유전자 지도 완성의 의미이다. 그 책에는 한 개체의 생물학적 생애를 결정하는 모든 유전 정보들이 들어 있다.

‘몸’은 이제 비밀도 우연도 아니다. 개체의 미래도 그러하다. 탄생의 순간 그는 이미 자신의 미래가 적힌 일기장을 갖고 태어난다. 그 일기장에는 이를테면 이렇게 씌어 있다. “나는 29세부터 심부전증을 앓고 마흔에 발작할 것이며 쉰아홉에는 후두암에 걸린다.”

인간이 흥미로운 존재인 것은 그에게 비밀이 많기 때문이다. 유전자 지도 완성은 인간에게서 비밀을 뺏고 그를 완벽한 투명성의 존재로 만드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한국인은 정이 많다”라고 할 때의 그 ‘정’의 비밀을 게놈지도로 읽어낼 수 있을까? “내 유전자는 그리움의 정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고 한 시인은 읊고 있다. 그 ‘그리움’을 게놈 독법으로 읽어낼 수 있을까. 한국 남자들은 왜 술자리에 여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왜 목에 힘주고 길바닥에 가래침 뱉기를 좋아하는지 유전자 독법으로 해독해 낼 수 있을까. 한국 여성들이 왜 남아를 선호하고, 아들의 대입 합격을 위해 백일기도하는지 게놈지도로 해명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사람의 성장은 문화적 사건▼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존재이며, 이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생물학적 해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의 크기, 중력, 기능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인식은 그리 깊지 않다. 문화라면 대개 우리는 ‘문화 예술’의 문화, ‘전통 문화’나 ‘문화산업’의 문화, 대중 또는 고급문화의 문화를 머리에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 생활 세계에서 보면 우리가 쓰는 문화라는 말의 의미는 넓다. 음주문화, 교통문화, 청소년문화, 청탁문화, 뒷거래문화, 파쇼문화 등 ‘문화’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실제로 이 넓은 의미의 것, 이 다양한 용도의 것이 ‘문화’이다. 영국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인간의 삶을 감싸는 거대한 ‘봉투’가 문화라고 말한다. 봉투라는 말은 오히려 협소하다. 문화라는 이름의 우주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사회체질개선 시민의 몫▼

사람은 문화의 우주 안에 태어나고 그 안에서 ‘인간’이 된다. 그의 출생은 생물학적 사건이지만 그의 성장은 문화적 사건이다.

그런데 그 비밀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제각각 차이와 다양성을 가진 존재로 성장하는 것일까. 특정 문화권에 태어난 사람들은 왜 비생물학적 공통성을 나눠 갖는 것일까.

쌍둥이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키우면 아주 다른 어른으로 자란다. 문화의 이 비밀은 아직도 많은 부분 비밀로 남아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언의 진실, “특정 문화는 특정의 사회 관계를 재생산한다”는 통찰의 진실뿐이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자란 사람은 가부장제적 사회관계를 재생산한다.

‘세살 버릇’이 의미하는 것도 이미 세살 때 개체가 체득한 문화, 곧 그의 문화 유전자이다. 이 문화 유전자의 중력은 강하고 그 수명은 길어서 노망의 순간까지 우리를 지배한다.

한 개체에게 주어지는 문화라는 우주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바꿀 수 있고 탈출할 수도 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문화, 사람 괴롭히는 고약한 문화는 바꾸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문화 개혁’이다. 민주주의 문화는 비민주적 문화의 개혁 위에 피어나는 새로운 문화이며 시민사회의 ‘기부문화’ 만들기도 시민적 공공성이 빈약한 문화를 자발성과 공공성에 높은 관심을 가진 문화로 바꿔 내는 일이다.

이 문화 개혁의 기획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시민사회다.

도정일(경희대 영문과 교수·문화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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