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27)의 '출현'과 그의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개봉(7월15일)은 일종의 사건이다. 장편 데뷔작인 액션영화 '죽거나'에서 기획 각본 연출 주연 무술감독 등 1인5역을 해낸 류승완은 학교에서 영화를 배운 적이 없고 대신 2000편이 넘는 영화를 보며 홀로 '내공'을 쌓아온 '씨네 키드'. 영상의 세례를 받고 자라 영화감독이 된 그에게서, 열여섯에 학교를 그만두고 비디오가게에서 일하던 영화광 출신으로 20세기 미국 영화사를 다시 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모습이 언뜻 엿보인다.
'죽거나∼'는 모두 6500만원을 들여 만든 단편 4개를 이어붙인 영화지만, 조악한 습작과는 거리가 멀다. 독립적이면서도 1부 조연이 2부 주연이 되는 식으로 연결돼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각 단편들은 액션 호러 다큐멘터리 갱스터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 때로 코믹하고 때로 가슴시린 슬픔을 전하는 '죽거나∼'는 만만치 않은 세상에 빈 주먹으로 맞서다 좌절한 사내들에 대한 거칠고 아름다운 송가다.
'한국의 타란티'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류승완이 말하는 나, 그리고 영화 이야기를 들어보면….
▼'죽거나 혹은…' 제작과정▼
대학을 가지 않았지만, 영화과 대학생들이 4년간 실습작품 4편을 만든다면 나도 단편을 4개 만든 뒤 장편으로 완성해보려고 생각했다. 이런 형식을 생각해낸 건 돈이 없어서다. 1998년 자투리 필름을 얻어 만든 '패싸움'을 시작으로 1부(패싸움) 3부(현대인)를 먼저 만든 뒤 2부(악몽) 4부(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동시에 만들었다. 충무로에서 연출부를 하면서 알게 된 스탭들이 틈틈이 합류했고 배우들은 무료로 출연해줬다. 이 영화는 그들 모두를 포함한 '우리의 영화'다. 이 영화를 만들며 박노해의 말처럼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걸 절감했다.
▼내 영화는 표절의 왕?▼
'죽거나∼'에는 내가 숱하게 보고 좋아한 영화들이 조금씩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 '표절의 왕'이라고 해야 하나? 액션 장면을 찍을 땐 '정무문' '비룡맹장' '영웅본색' '장군의 아들'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2부 '악몽'에서 귀신 장면은 존 카펜터나 웨스 크레이븐 감독 영화처럼 만들고 싶었는데 잘 안됐다. 4부는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를 벤치마킹했는데 그 중 공사장 액션 장면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입장면을 참고했다. 폭력배들이 극렬하게 싸우는 이 장면에서 종래 깡패영화의 영웅을 극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해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성룡과 타란티노로부터 받은 영향▼
성룡 때문에 영화에 매혹됐지만 스무살 무렵, 성룡의 영화를 좋아하는 게 유치한 것 같아 어려운 영화들을 열심히 봤다. 그러다가 마치 동성연애자가 '커밍 아웃'을 하는 것만큼이나 힘들게 성룡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건, 쿠엔틴 타란티노 덕분이다. 싸구려 소설에서 이야기를 따온 그의 '펄프 픽션'(94년작)을 보며,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저급하다고 숨겨온 스스로가 가증스러워졌다. 나는 주말연속극처럼 통속적인 문화 속에서 자랐고 거기서 자양분을 얻은 대중문화의 아들이다. '내 인생의 영화'는 단연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이고 그의 영화에 출연하는 게 내 꿈이다.
▼나의 영화 스승▼
내가 본 영화와 사람들 그리고 현장이다. 밤까지 꼬박새며 촬영현장에서 36시간을 보내고 버스에서 편히 자는 법 같은 건 학교에서 못배운다. 요즘은 자꾸 늘어지려고 해 어제부터 십팔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죽거나∼'를 넘어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할텐데, 이 영화 한 편 남기고 도태될까봐 두렵다. '롤라 런'이나 '그랑 블루'처럼 활동사진의 쾌감을 전하는 동적인 영화들이 나는 좋다. 액션영화 뿐만 아니라 암울한 필름 누아르나 슬랩스틱 코미디도 만들어 보고 싶다.
■류승완감독의 영화 이력서
1973년생
1979년〓성룡 영화를 본뒤 그의 추종자가 되다.
1980년〓'취권'을 보고 태권도장 출입 시 작.
1986년〓중학교 입학. '무술영화 백과사전' 구입.
1989년〓고교 입학. 8㎜ 카메라 구입, '나쁜 일요일'등 미완성 단편 제작.
1990년〓'미라클'개봉때 방한한 성룡과 동 아극장에서 악수.
1992년〓고교 졸업. 필름 워크샵, 시네마테 크 순례 시작.
1995년〓단편 4개를 모은 장편 '죽거나 혹 은 나쁘거나' 구상.
1996년〓박찬욱 감독의 '삼인조' 연출부.
1997년〓'여고괴담' 연출부. 단편 '패싸움'(장편의 1부)제작.
1998년〓'닥터K'연출부. '패싸움'부산단 편영화제 우수상 수상.
1999년〓단편 '현대인'(장편의 3부) 한국독 립단편영화제 관객상,최우수작품상 수상. 단편 '악몽'(장편의 2부)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장편의 4 부)제작.
2000년〓장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완성. 4월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매진.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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